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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즈

이온디
2005년 03월 07일

  찰스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는 제목 그대로 '근대(modern times)'에 대한 영화다. 동시에 그것은 다양한 근대적 공간들(modern spaces)에 대한 영화며, 그 근대적 공간들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에 대한 얘기다.

자본주의는, 베버가 분석했듯이 프로테스탄트적인 금욕주의를 통해서 발전했다. 그것은 자본가들에게는 절욕과 절약을 통해 축적 그 자체를 추구하도록 했으며, 노동자들에게는 주어진 직업을 천직으로 삼도록 했으며,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억제하고 고된 노동을 견뎌 내는 습속(ethos)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사정은 포드주의가 생산에 도입되면서 크게 달라진다. 그것은 대량생산을 위한 체제였고, 대량생산을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생산체제였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자본주의의 이상을 컨베이어 벨트와 대규모 기계 등을 통해 실현시키려는 체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게 대량생산한 상품은 과연 누가 소비할 수 있는가? 이러한 모순에 쌓여서 폭발한 것이 바로 1929년의 대공황이다.

방랑하는 분열자의 출현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봉건적 가신집단들의 해체와 폭력적 토지수탈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이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세상에 나타난 것과 동일하게 빠른 속도로 신흥 메뉴팩처에 의해 도저히 흡수될 수는 없었다. 또한 그들의 관습적인 생활양식에서 갑자기 내몰린 사람들이 그만큼 갑자기 새로운 환경의 규율에 순응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대량으로 거지, 도둑, 부랑자가 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별다른 도리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그 본질상 이러한 분열적 흐름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

<모던 타임즈>의 가장 유명한 신 중 하나는 컨베이어 벨트 신이다. 채플린은 컨베이어 밸트를 따라 흘러가는 기계에 너트를 조인다. 벌이 눈앞에서 뱅뱅 돌며 채플린을 위협해도 그로서는 쫓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러다간 어느새 조여야 할 기계는 저만큼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동료와 다투는 것도 기계에 매여 있다. 일찍이 '과학적 관리'란 이름 아래 노동자들의 동작과 시간의 사용을 통제하고 관리하려 했던 테일러(F.Taylor)의 이상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브레이버만(H.Braverman)의 유명한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그것은 노동과정을 노동자의 기능에서 분리하고, 구상과 실행을 분리하며, 구상기능을 자본가/관리자가 독점하여 노동 과정의 각 단계와 행위양식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 개개인의 작업을 관리자의 의지대로 통제하려는 자본가의 오래된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채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손. 거기서 손을 움직이는 의지는 채플린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것이요 테일러의 것이다. 테일러주의의 요체는 바로 이처럼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를 관리자의 의지대로 길들이고 작동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의 신체를 길들이려는 '의지'요, 자본가의 의지대로 그들의 신체를 통제하는 권력이다. 요컨대 채플린이 여기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테일러주의(포드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신체를 통제하는 권력이란 것이다. 그로부터 약 40년 뒤에 푸코는 이를 '생체권력'이라고 개념화한 바 있다.

<모던 타임즈>는 화면을 가득 채운 시계를 타이틀 백으로 하여 시작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기묘한 말장난이 개재해 있다. <모던 타임즈>가 근대적 시간을 뜻하는 시계--이는 다시 보겠지만 "결코 은유가 아니다."--로 시작함을 보여 줌으로써 '근대'가 근대적 시간을 통해 시작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내용
컨베어 벨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찰리는 하루 종일 나사못 조이는 일을 하고 있다. 단순 작업의 결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여버리는 강박 관념에 빠지고 찰리는 정신이 이상해져서 급기야 정신 병원까지 가게된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방황하다가 시위 군중에 휩싸여 감옥에 끌려가게 된다. 몇 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난 찰리는 빵을 훔친 예쁜 소녀를 도와준다. 근사한 집을 사기 위해 백화점 경비원으로 취직하기도 하고, 철공소에서 일을 하나 번번히 소동으로 막을 내린다. 소녀의 도움으로 카페에서 일하게 된 찰리는 자신을 추적하는 사람들에 아랑곳 않고 노래를 하다가 결국 다시 떠돌이로 남는다. 거리에 나선 찰리와 소녀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는다.

◈요모조모
돈과 기계에 칭칭 얽어맨 '현재의 시대'를 풍자한 채플린의 장편 희극. 목공공장의 공원 찰리는 벨트콘베이어(전송대)에서 운반되어 오는 부품의 나사를 계속 조이는데, 손이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미친 사람으로 인정되어 병원에 보내진다. 퇴원하자 해고가 되어 거리를 헤매이다가 공원의 데모대에 휩쓸려 리더로 오인받아 감옥행, 이후 석방되어 조선소에서 일하지만 미완성의 배를 진수시켜버리고, 선착장에서 먹을 것을 훔친 아가씨와 함께 도망친다. 강가에 낡은 창고를 발견해 살면서 두 사람은 직장찾기에 나선다. 발성 영화를 싫어했던 채플린이 무국적어로 "티티나"를 불러,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려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채플린의 작품 중 가장 따뜻하고 희망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를 만들 당시 그는 19살이었던 폴래트 고다드를 만나 3번째 결혼을 한다. 플래트 고다드는 배우는 아니었으나 배우가 되고 싶어했다. 채플린은 그녀를 완벽한 배우로 창조하고자 결심해 그녀를 <모던 타임즈>의 여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영화 <모던 타임즈>는 채플린이 기존의 찰리에게서 벗어나고자 한 첫 시도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중절모와 헐렁한 바지대신 노동자 복장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다분히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에 비판을 가한다. 그러나 극 중에서 찰리가 하수구로 나오다가, 파업 대모대의 선두에 서게 돼 좌파 지도자로 변신하는 풍자를 보면, 그가 어떤 이념에 빠져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신의 험난한 역정과 풍부한 독서로 얻어진 가난한 사람들의 애정이 역동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아내 폴래트 고다드는 빵을 훔치는 소녀로 나와서 훌륭하게 데뷔를 장식했다. 그리고 콘베이어의 시스템에서의 작업 끝에 기계처럼 돼버린 노동자를 연기한 채플린의 연기는 희극 영화 사상, 최고의 연기로 블랙 코미디의 원형처럼 된다.

비평
"기계라는 것이 사회와 인간을 위해 사용된다면, 오히려 인간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노동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지적 향상과 생활의 즐거움을 증진시킬 수 있지 않은가" 이 말은 기계를 싫어하여 항상 고풍스러운 마차를 타고 다닌 마하트마 간디와의 회견 때 채플린이 한 말이다. 그후 그는 <모던 타임즈>에 관한 회견에서 "근대화된 기계문명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기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를 반대한다."고 선언 했다. 그는 근대 기계기술이 제대로 사용될 때 그 효용가치에 대해서는 오히려 위에 인용된 문구처럼, 근대 기술을 예찬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를 단지 예찬론자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현대 기계 문명의 폐해에 대한 채플린의 예견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시선에 직면하게 된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30년대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일대 사회혁신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채플린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직접적인 배경 역시 그와 관련 지어 진다. 채플린은 한 신문기자에게서 디트로이트 공장에 다니는 어느 청년이 공장에 들어가 일하다가 마침내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영화 도입부에 돼지 무리와 공장문을 들어서는 노동자의 무리의 교차와 이후 자기가 일할 기계를 찾아 가는 장면은 이 영화가 기계화 시대에 대한 비판을 가할 것을 암시한다. 그 예가 방랑자가 기계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마는 지경에 이르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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