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
설기현(27)은 성실하다. 몸 아낄 줄도, 잔재주 피울 줄도 모른다. 설기현은 바위 같다. 쉬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2006 월드컵
평가전에서의 '역주행' 파문도, "이류 선수"란 세간의 독설도 그를 절망케 하지 못했다. 설기현은 맘 여린 사내다. 공항에서 어머니와 헤어질
때면 어린 시절 가슴에 박힌 못이 부르르 떤다. 그래도 웃는다. 아플수록 절실히 웃어야 함을 그는 삶으로 안다. 이런 설기현이 요즘 상한가다.
세계 축구선수들의 꿈, 프리미어리그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치고 있다. 팬들이 환호할 때마다 그가 떠올리는 건 손 거칠고 무릎 상한 어머니다.
영국의 그와는 전화로, 강릉의 어머니와는 눈 맞춰가며 추석에도 함께할 수 없는 맘을 물었다.
<강릉> 글=이나리 기자
<
wind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shotgun@joongang.co.kr>
◆ 어머니 김영자
탄광 사고로 남편 잃고 서른한
살 청상으로
버티고 버틴 포장마차 3년, 막노동 12년, 과일노점 3년 "과일 좌판은 지난해 12월에
걷어버렸어요."
설기현 선수의 어머니 김영자(50)씨. 2000년 아들이 벨기에 앤트워프팀 입단 계약금을 몽땅 털어 사준 집에서
그를 만났다. 허리며 심장이며 죄 덜컥거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포장마차 3년, 막노동 12년, 과일 좌판 3년. 그래도 어머니는
"좋다"고 했다. "애들이 잘 컸잖아요. 며느리들 착해, 기현이 이름값 해, 더 욕심 내면 죄 받죠."
1987년 어머니는 광산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아들 넷 딸린 서른한 살 청상. 쥐꼬리만 한 보상금으로 강릉시 변두리에 오두막을 얻었다. 둘째 기현이가 축구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땐가 애가 그래요. '선생님이 나 공 잘 찬다고 축구부 하래'. 합숙훈련 한다며 일주일에
열흘씩 안 들어오는데 아, 보고 싶어 미치겠데요." 장사 틈틈이 학교를 찾았다. 그래도 들어가진 못했다. 담 너머 훔쳐보는 게 다였다. "염치가
있어야지, 해준 게 없잖아요."
설기현의 설명을 빌리면 이랬다. "한 달에 한 번씩 축구부 학부모회 모임이 있어요. 친구들은
아버지까지 오시는데 전 혼자였죠. 운동장 구석에서 공만 찼죠 뭐." 양식 걱정이 끊이지 않는 마당에 매달 1만원인 학부모회비는 요령부득이었다.
전지훈련비도 낼 수 없었다. 아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공만 잘 차면 모든 게 용서된다'. 남들 안 보이는 곳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엄마 냄새는 그리웠다. 그때부터였다. 조금 울고 많이 웃기 시작한 것은.
◆ 나
설기현
"힘들어서 축구 못 하겠어요" 공사판에 이끌려 갔다
엄마는 더 힘드셨구나 … 다시 축구로
돌아갔다1993년 2월. 멀리 주문진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불쑥
나타났다. "엄마, 힘들어 나 축구 못 하겠어." 어머니는 기가 막혔다. "할 줄 아는 건 축구밖에 없는 놈이. 기현이는 헛말을 않거든요.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어요." 궁리 끝에 어머니는 "공사판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축구 아니면 몸으로 먹고살 수밖에 없으니 일찌감치
일이나 배워두라"고 일렀다. 일당 2만5000원이라는 말에 아들은 선뜻 따라나섰다. 이틀 뒤, 무릎 꿇은 아들이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잘못했어요. 이젠 정말 축구만 할게. 어떤 일이 있어도 꼭 해낼게."
설기현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막노동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했다. "똑같은 일을 끝도 없이 반복하잖아요. 너무 춥고 힘든데, 그걸 묵묵히 견뎌내는 엄마가 안쓰럽고 존경스럽고. 그때 정말
결심했어요. 꼭 훌륭한 선수가 돼 엄마 호강시켜드리겠다고." 몇 달 뒤 동료들이 훈련에서 단체 이탈했을 때 그 홀로 자리를 지킨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배신자로 낙인찍혀 졸업 때까지 왕따를 당했지만 그는 감수했다.
◆ 아내 윤미
제발 와 달라던 기현씨
… 두말 없이 벨기에로 갔다
인웅이와 수아, 이제 네 식구 … 행복하다광운대 4학년이던 2000년, 설기현은 대한축구협회
주선으로 벨기에 1부리그 로열 앤트워프에 입단했다. 낯선 땅에 던져진 그는 향수병에 시달렸다. 당시 여자친구 윤미(25)씨에게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대학동기 여동생이에요. 부산 동아대 섬유미술과 학생이었는데 제가 그랬어요. 날 위해 희생해 달라, 나중엔 내가 널 위해
희생하겠다고." 윤미씨는 두말 없이 그에게로 날아와 줬다. "고맙지요, 모든 게 다. 그땐 스포트라이트 받을 때도 아니고 돈도 없었어요. 근데
다 포기하고 와줬잖아요. 덕분에 지금 제가 있는 거죠." 2002년 아들 인웅이가 태어났고 2003년 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딸 수아가 태어난
게 지난해 11월이다.
◆ 영원한 울타리
어머니와 추석 쇤 게 언제인지 …
함께 웃음꽃 피울 그날까지 모두
건강하길
설기현은 가족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쉼없이 달렸다. 2001년 벨기에 명문 안더레흐트 이적,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전 동점골, 2004년 잉글랜드 2부리그
울버햄튼 원더러스FC 이적. 그런데 2005년,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잦은 부상, 예기치 않은 피부병, 감독과의 불화. 출장 기회는 줄어들고
평판은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 속은 더 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어 터진 역주행 논란.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 패스할 곳을 찾지 못한 그가 한국
진영으로 공을 몰고 간 것이다. 어렵게 출장한 월드컵 본선 프랑스전에서 박지성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늘 힘들었지만 올
상반기가 가장 고통스러웠어요. 가족이 없었다면 이겨내지 못했을 거예요. 세상이 날 다 비웃어도 언제나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그게 정말 큰
힘이 되더라고요."
7월, 새 기회가 찾아왔다. 올해 처음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레딩FC의 스티브 코펠 감독이 그를 적극 끌어당긴
것이다. 이어 이루어진 첫 경기. 그는 화려한 플레이로 단박에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됐다. 그리고 19일, 마침내 첫 골이 터졌다. 힘들
때도 별 내색 없던 아들은 좋은 일에도 무덤덤했다. "장하다"는 어머니의 칭찬에 "더 잘해야지요" 한 마디뿐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알 수
있었다. 아들이 참으로 행복해하고 있음을.
설기현은 "유럽 진출 뒤 가족과 추석을 보낸 적이 한번도 없다"며 "어머니, 형제들이
너무나 보고 싶다"고 했다. 아쉽기론 어머니가 더 할 것이다. "우리 애들이 우애가 깊어요. 엄마는 돈 번다고 만날 한밤중이지, 지들끼리 라면
끓여먹고 숙제 봐줘가며 알아서들 컸어요. 아들 넷에 며느리 둘, 손자 셋, 마루 그득 앉혀놓고 한번 크게 웃어보고 싶네요." 그 말을 전하자
설기현이 답했다. "어머니, 그런 날 곧 올 거예요. 우리 수아 자꾸 눈에 밟힌다고 하셨죠. 오는 설엔 한복 곱게 차려입은 아이 기쁜 맘으로
안겨 드릴게요. 그러기 위해 더 열심히 뛸게요. 부끄럽지 않은 엄마 아들이 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