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하학자의 한글 창제

이온디
2007년 10월 19일

고등과학원 수학부 최재경 교수가 자신이 개발한 자음을 칠판에 적어 보이고 있다. 최 교수는 “우리말에 없는 외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V나 F 같은 영어 알파벳 발음은 한글로 정확히 표기할 수 없다. 학술대회에 온 외국인을 위해 한 교수가 나섰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 원리를 참고해 자음 다섯 자를 만들었다. 얼핏 보면 외계어 같지만 외국학자들은 배워 보겠단다.

홍릉 고등과학원엔 그들만의 한글이 있다.》

■ 고등과학원 최재경 교수 이색 시도

‘?’ ‘@’ ‘A’ ‘·’ ‘…’

서울 홍릉 고등과학원 원내에서만 사용되는 독특한 글자다. 언뜻 보면 인터넷을 떠도는 ‘외계어’ 같지만 전 세계 수학 석학들이 모인 정식 학회에서 소개된 엄연한 글자다. 이들 글자는 모두 고등과학원 수학부 최재경 교수가 만들었다. 최 교수는 “우리말에는 없는 외국어 발음을 표시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고 말했다.

○ 한글 창제 원리 응용

이들 글자가 처음 선보인 것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월 고등과학원이 개최한 ‘기하학회’에 참가한 25명의 외국 수학자는 행사 팸플릿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글 자음과 모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표에 별도로 글자들이 적혀 있던 것.

이를 본 몇몇 한국 교수는 “글자가 깨진 것 같다”고 지적했다. 우리말에 없는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고 최 교수가 답변하자 학회에 참석한 25명의 외국 수학자는 큰 관심을 보였다. 미국 매사추세츠대 로버트 커스너 교수는 “최 교수의 아이디어가 재미있다”며 “미국으로 돌아가 꼭 써 보겠다”고 했다.

기하학자인 최 교수가 우리말 발음에는 없는 문자를 만든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로 올라간다. 수학만큼이나 국어에 관심이 많던 그는 영어 알파벳의 ‘v’와 ‘f’는 왜 정확히 표기할 수 없을까란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발음 표기 방법을 한번 만들어 보기로 했다.

당시 최 교수가 만든 방식은 직관적이다. 그는 발음이 비슷한 자음은 한 획을 더해 만든다는 한글 창제의 원리를 적용했다.

그는 알파벳 ‘v’는 완벽한 ‘ㅂ(비읍)’으로 발음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해 한 획을 뺐다. ‘f’ 역시 ‘ㅍ(피읖)’보다 약하게 들려 한 획을 뺐다. 그렇게 나온 글자가 ‘?’과 ‘A’이다. 물론 ‘v’ 발음에 가깝지만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순경음비읍(ㅸ)도 있다. 하지만 획수가 너무 많고 음절 하나가 너무 복잡하다는 단점이 있다.

잠시 관심을 접고 수학자의 길을 걷던 최 교수가 글자를 다시 추가한 것은 11년 전. 포스텍(당시 포항공대)에 재직하던 그는 z, ð, L 발음을 표기하는 자음 3개를 더했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 따라 ‘ㅈ’에 한 획을 붙여 ‘z’를 표시하는 ‘@’를 만들었다.

영어 정관사 ‘the(더)’에서 ‘ð’ 발음은 ‘ㄷ’을 시계방향으로 돌려 ‘·’로 표기했다. 한국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thank’의 애매한 ‘L’를 발음은 ‘ㅆ’ 대신 ‘…’로 바꿨다. 최 교수가 만든 글자를 쓰면 사람 이름 ‘David’는 ‘데이비드’가 아닌 ‘데이?l드’로, 영을 뜻하는 ‘zero’는 ‘제로’가 아닌 ‘@ㅔ로’로 쓴다.

○ 한글 수출, 외국인에게 보탬 되길

국어학자도 아닌 수학자가 만든 자음을 보는 시각은 둘로 나뉜다. 최 교수가 만든 글자를 본 한국 사람은 ‘반대’, 외국인은 ‘찬성’이라고 한다. 그의 아내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조차 “세종대왕이 만든 아름다운 한글을 훼손한다”며 반대했다. 반면 미국과 유럽 수학자들은 “한글 자음에 없는 발음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어 좋을 것 같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한국 사람을 위해 만든 글자가 결코 아니다”라며 “고등과학원이 여는 학술행사 때 외엔 이 글자를 사용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이런 글자가 없어도 고유한 말을 표현하는 데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각국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온누리 한글표기법’을 제시한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정원수 교수는 “한글을 세계에 수출하기 위해 그간 여러 국어학자가 표기법을 확대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했다”며 “최 교수의 경우도 일부 수정 보완할 점이 있지만 흥미롭다”고 평가했다. 최 교수도 “전 세계에 문자가 없는 6000여 종족에게 한글을 수출할 때나 자기 이름이 우리말로 정확히 불리기 원하는 외국인이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한편 한 해 40회의 국제학술대회를 주관하는 고등과학원은 이달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외국 학자에게 한글을 소개하면서 최 교수가 만든 5개 자음도 함께 소개하기로 했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190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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