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시인 김소원' <중>
2008.12.10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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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활달하여 종가 살림살이를 떠맡고 있던 소월의 모친은 "인제부터는 자네가 우리 갓놈에게 이야기를 실컷 좀 들려주게.나는 이야기하는 재질도 없고 또 할 말도 없어"라며 소월을 동서 계희영에게 떠맡겼다.

혼인한 직후부터 숙부가 고향을 등지고 외지를 떠도는 바람에 소박맞은 것처럼 혼자가 된 숙모는 틈날 때마다 찰싹 달라붙는 소월에게 심청전 장화홍련전 춘향전 옥루몽 삼국지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범한 기억력과 관찰력을 가졌던 소월은 이것들을 다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구술하는 데도 재간을 보인다.

폐인으로 일생을 마친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혐오의 양가감정에 휩싸여 있던소월을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시세계로 이끈 것은 어머니와 수시로 옛날 이야기와 민요를 들려주던 숙모로부터 받은 압도적인 영향이다.

유년기에 듣던 숙모의 이야기들은 소월의 문학적 자양이 되기도 하는데 평안도박천 진두강가에 살던 오누이가 계모의 학대로 죽어 접동새가 되었다는 설화를담은 "접동새"같은 시는 바로 숙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모태로 씌어진 것이다.

부친이 폐인이 되자 광산을 경영하던 조부가 소월의 교육을 책임졌다.

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남산 보통학교를 마친 소월은 민족적 자긍심이 강했던오산학교에 진학한다.

여기서 그의 문학의 두 번째 스승인 김억을 만나게 된다.

소월은 김억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에 몰입하게 되고 "창조" 동인이었던 김억의 소개로 마침내 1920년 3월 "창조"에 "낭인(浪人)의 봄"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데뷔한다.

그리고 같은 해 학생계 7월호에 "거친 풀""흐트러진 모래"등을 발표하여 자신의문학적 자질을 확인하게 된다.

그 후 소월은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폐교하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할 때까지 "개벽"에 "엄마야 누나야""봄 밤""진달래꽃""개여울""먼 후일"등과 소설 "함박눈"등을 꾸준히 발표한다.

이듬해인 192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 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짧은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다.

이때 서울에 머물며 안서와 함께 이리저리 직장을 구하고 활동무대를 찾았으나여의치 않자 소월은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사던 소설가 월탄 박종화는 이즈음 두어 번 소월을 만나는데 그의 인상을 단아하고 얌전한 사람이었다고 쓰고 있다.

잠시 "영대(靈臺)"의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25년 소월은 살아 있을 때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펴낸다.

이때 발표된 시편들은 거의 오산학교 시절,그의 나이 불과 17,8세에 씌어진 것들로 여기에 나타난 민요의 가락,한과 슬픔의 정조,설화성 등은 당대 문인들의주목을 받는다.

그의 스승인 안서 김억은 1939년 봄에 "소월시초(素月詩抄)"를 펴내며 "나이가불과 17,8이라고 하면 아직도 세상을 모르고 덤빌 것이어늘 이 시인은 혼자 고요히 자기의 내면생활을 들여다보면서 시작에 해가 가고 날이 저무는 것을 모르고 삼매경에 지냈으니 조숙(早熟)이라도 대단한 조숙이외다"라고 소월에 대해 쓰고 있다.

문단의 성향이 카프 중심으로 한창 떠들썩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한켠에서 묵묵히 우리 고유의 언어와 정서를 빚어내던 김소월이 이 해 펴낸 이 시집은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의 시를 가리켜 민요적 리듬과 부드러운 시골 정조 외에는 보잘 것 없다는 평가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이 시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서구사조의 모방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색채와 목소리로 노래한다.

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시집의 표제로 삼은 "진달래꽃"은 님에 대한 사랑,그리고 이별이 처절할만큼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되어 있다.

미래에 있을 이별을 예감하면서 가는 님을 잡지 않고 고이 보내드린다거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린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서구 유행사조도 흉내낼 수 없는 한국식 사랑이다.

이러한 이별의 표현법은 진달래꽃 외에도 "못 잊어""예전에 미처 몰랐어요""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님의 노래""먼 후일""초혼""왕십리""산유화""엄마야 누나야"등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작품에서 계속된다.

이것은 당시의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전쟁으로 끊임없이 상실의 아픔을 겪게되는 우리 민족 역사 전반에 걸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먼 훗날까지 많은이들에게 애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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