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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신재기

이온디
2009년 04월 19일
* 이 글은  <대구사회> 제3호(2002년 5-6호)에 '수필'로 게재된 글입니다. 
신재기(영남수필문학회)

    나는 얼마 전까지 어떤 공공 단체가 운영하는 문화 강좌에서 '수필 창작'을 강의한 적이 있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 제 스스로도 추스르지 못하는 주제에 괜스레 뛰어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 공간을 금방 떠나지 못했던 것은 내가 글쓰기에 관해 누구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배운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나를 조금씩 긴장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무렵 글쓰기 자체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봤다. 그 때의 자의식을 산만하게나마 정리해 본다. 

    왜 글을 쓰고자 하는가? 그럴듯한 이유를 말하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대부분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한다. 가장 크게 눈에 띠는 것은 나를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한다. 이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본능의 차원에 머물고서는 글이 제대로 설 수 없다. 여기에서 글쓰기는 '자기 드러내기'의 본능을 억제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이런 점에서 글쓰기는 자신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감추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전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 것과 같다. 드러냄이 제대로 빛깔과 무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감춤이 필요하다. 글이 원활한 소통을 전제하고 있다면, 글쓰기는 방향성 없이 쏟아지는 생각의 여러 갈래를 통제하여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내 생각과 느낌을 드러내고 싶다면 우선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말을 절제하고 내 자신을 감추는 것이 드러내기보다 더 어렵다는 점은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글의 존재 방식은 소통이다. 소통은 나와 타자를 잇는 통로의 원활한 개통을 말한다. 언뜻 이 소통의 흐름은 글 쓰는 이에서 독자로 나아가는 일방향일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쌍방향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글쓰기가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드러내고 배설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임을 말해 준다. 이러한 원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필자는 자기를 말하기에 조급증을 보인다. 모든 생각과  판단을 자신의 주관에 의존하여 실행하기 때문에 '나'를 벗어나서 타자를 염두에 둘 겨를이 없다. 관객이 모두 자리를 떠나버린 사실도 모르고 자신의 언어와 방식 속에 갇혀 춤을 추고 있는 꼴이다. 나에게 심각하고 매력적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매일 이마를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도 세부적인 것에 이르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그리 크지 않음을 본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인을 심중을 읽어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내 생각과 느낌을 타인의 것과 접목시켜 그 공유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글쓰기다. 글은 나의 독백이 아니라, 너와 나의 대화라 하겠다. 

    글쓰기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흔히 '내가 살아온 파란만장한 인생을 이야기로 쓰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하다'라고 말한다. 글로 자신의 삶의 숱한 사연들을 전부 말해보겠다는 심산이다. 이 때 글은 어떤 내용을 담는 그릇의 의미를 지닌다. 글의 핵심은 소위 주제와 사상이란 생각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물론 글 속에는 글쓴이의 중심 생각이 녹아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글의 전부는 아니다. 내용은 형식에서 나오고 형식은 그 내용을 담는다는 점에서 내용과 형식은 하나라고 말하면서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을 경계하는 경우를 본다. 이는 이제 거의 일반화된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실제의 글쓰기에서 사람들은 그래도 내용이 우선이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내용 우선주의를 청산할 필요가 있다. 글쓰기 공부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집중되어야 한다. 글쓰기의 핵심은 문체라고 말하는 까닭을 깊이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말하는가'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용의 무게에 대한 맹목적인 존경심을 버릴수록 글쓰기의 진미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글쓰기의 재능론에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다. 자신은 글재주가 부족하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경우는, 학창 시절의 작은 찬사에 기대어 스스로 글 재능이 있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망이다. 넘치는 재능의 결과물이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글쓰기에서 타고난 소질의 개인차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글 전체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의 무게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당위적인 진술이 현실에서 설득력이 부족할 수 있다. 뛰어난 글재주를 보이는 사람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입장은 글쓰기를 특정인의 전유물로 인식하는 것에 제동을 건다. 또한 가장된 신비성과 우상을 깸으로써 글쓰기를 친숙한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누구나 훈련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믿음이 글쓰기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질적 저하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권위 훼손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의 민주화를 이룩했다면 그것이 더 값진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좋은 글을 쓰고 싶어한다. 그리고 훌륭한 글을 써 자신의 이름도 날리고 대중적 인기와 부도 얻기를 희망한다. 세속적인 욕망이 아니더라도 많은 문인들은 걸작을 남겨 자신의 문명을 문학사에 길이 전하겠다는 야망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길을 가로막는 큰 방해꾼이 바로 훌륭한 글을 쓰겠다는 욕망이다. 욕망의 키가 크면 클수록 글은 제 자리를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멸의 걸작을 남겼던가? 글로써 그 이름을 역사에 새긴 사람은 매우 극소수의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하자. 모든 것을 갖춘 상태에서 완벽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글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제대로 된 글보다 있으나 마나하거나 공해로 남는 글이 더 많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도 괜찮다. 상업성에 편승한 졸속의 대량생산은 경계해야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 지나치게 소심하거나 불가능한 완벽을 위해 언제나 긴장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무모한 시도가 국면을 새롭게 바꿔놓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신문기자는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 안에 기사를 마감한다. 어떤 소설가는 장편소설 한편을 한 달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글의 생산 속도와 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글쓰기에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글을 직접 쓰는 본인은 힘들었을는지 모르지만 밖에서는 너무나 쉽게 보인다. 무슨 비결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초능력도 비결도 왕도도 없다. 글쓰기도 하나의 사회적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제도에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굳어진 관습과 규칙이 있다. 그렇다. 글쓰기도 그 제도적 규칙들을 익히고 적응해 가는 것에서 출발한다. 글쓰기의 비결은 그 규칙에 익숙해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정해진 규칙만을 준수하면 창의성을 살리기 어렵다. 발전성도 없다. 제도의 관습을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실험정신이 필요하다. 비평가 롤랑 바르트도 글쓰기는 시스템이지만, 그 시스템을 뛰어넘음으로써 시스템으로서 글쓰기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글쓰기도 기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시스템인 것이다. 

  '글쓰기'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문자언어 행위를 총괄적으로 지칭하는 이 말은 다른 영역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그 자체의 고유성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 크게 '글쓰기 행위'의 자의식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글쓰기란 용어의 빈번한 등장은 글쓰기에 대한 강한 자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표현의 기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글쓰기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진정한 글쓰기의 길을 모색하는 철저한 자의식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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