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I – X로 닥친 시련, HD로 넘다
가장 먼저 10000번의 벽을 넘은 제조사다. Radeon 그래픽카드의 처음은 하나의 모델명일 뿐이었다. 팔리던 제품들은 Radeon, Radeon VE, Radeon LE 등의 단순한 이름을 가졌다. 하지만 Radeon이라는 이름이 인기를 끌자 차세대 제품군부터 네 자리 숫자를 이름으로 붙였다. 이때부터 ATI의 그래픽카드 제품군이 크게 확대됐다. 하지만 첫 제품이 7000번대부터 시작한 탓에 세 세대만에 9000번대의 이름을 갖게 됐다.
2005년 그래픽카드가 AGP에서 PCI 익스프레스로 바뀌면서 ATI는 X 시리즈를 내놓는다. 로마자로 10이라는 의미와 PCI 익스프레스, 다이렉트 X라는 의미를 함께 부여해 X800, X600 등이 주력으로 팔렸지만 9000번대의 영광을 이어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다음 세대인 X1900, X1600 등으로 이어지면서도 썩 신통치 않은 반응이었다.
하지만 X를 떼고 고해상도 영상을 뜻하는 HD를 붙인 Radeon HD 2000 시리즈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등장한 HD 3000, HD 4000 등의 시리즈는 이름 뿐 아니라 성능 면에서도 그간의 불만을 싹 씻어내면서 ATI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더구나 3, 4 등의 시리즈 뒤에 붙은 4(850), 3(650) 등의 이름들이 제품의 포지션을 잘 짚으면서 실적도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당분간은 안심이다.
엔비디아 – 10세대는 200시리즈로
꾸준히 1년에 한번씩 세대 교체를 해 왔던 엔비디아 지포스가 벌써 열 번째 세대 교체를 했다. 1999년 첫 등장한 ‘지포스 256’은 하드웨어로 T&L(Transform & Lighting) 처리를 하면서 CPU의 부담을 덜고 첫 GPU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지포스 256이라는 이름은 이전 세대 제품인 리바 128 시리즈에서 이어지는 이름이었다. GPU라는 새로운 개념이 지포스 256을 성공으로 이끌자 엔비디아는 이듬해 2세대 제품을 내놓으면서 지포스를 브랜드로 만들고 숫자를 이름으로 채택한다.
지금처럼 복잡한 숫자들이 아니라 지포스 2 GTX, 지포스 2 MX 등의 이름을 가지면서 약간의 성능 차이를 둔 약 너댓개의 시리즈를 가져가던 것이 3세대에 들어 숫자를 붙여 제품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지포스 3 TI 200’ ‘지포스 3 TI 500’ 등이 팔렸다. 4세대에 들어서도 ‘지포스 4 Ti 4200’ ‘지포스 4 440MX’ 등으로 이어졌다. 6세대에 들어서 ‘지포스 6600’ 등이 본격적으로 숫자 이름 붙이기에 불을 지폈다.
엔비디아도 지난 해 9000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이름에 대한 고민을 떠안았다. 하지만 답은 의외였다. GTX280, GTX260 등의 이름을 붙여 10번째 세대 제품을 내놓았다. 10000이나 1로 시작하는 이름은 적절치 않다고 여겨 성능을 세분화하는 알파벳을 앞으로 뺀 200 시리즈를 만들었다.
하지만 GT260은 두 번째 자리가 6인 8600GT나 9600GT와 달리 가격대가 상당히 높아져 아직 쉽게 다가서기 어렵고 가장 많이 팔리는 10~20만원 사이의 제품이 없어 이렇다 할 세대 교체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앞으로 메인스트림, 엔트리 모델을 내놓고 200 시리즈를 밀 계획이다.
인텔 – 네할렘 덕분에 안심
세번째로 10000번의 벽에 맞닥뜨린 인텔은 애초에 CPU의 모델명을 작동 속도로 정했다. ‘펜티엄 3 800MHz’ ‘펜티엄 4 2.8GHz’ 등이 이름이었다. 하지만 공정을 바꾸면서 같은 속도에 제원이 살짝 달라진 제품들이 엉키는 것이 문제였다. 펜티엄 4가 윌라멧으로 시작해 노스우드, 프레스콧, 시더밀 등의 세대 교체를 하면서 겹치는 제품들이 생겨났다. 똑 같은 펜티엄 4 2.4는 2.4GHz로 작동하는 제품들이 겹치면서 2.4A, 2.4B, 2.4C 등으로 구별해야 하는 일도 생겼다. 더구나 작동 속도가 3GHz 언저리에서 벽에 부딪히면서 2.x대에 제품들이 정체되는 것도 악재였다.
결국 등급을 나타내는 세 자리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2004년 ‘펜티엄 4 630’ ‘셀러론 320’ 등의 이름을 붙이면서 첫 숫자로 시리즈의 등급을, 두 번째 숫자로 시리즈 안의 제품 등급을 나누었다.
2006년 코어 2 듀오를 내놓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제품들과 서브 모델들을 정리하기 위해 코어 2 듀오 E6300, 코어 2 쿼드 Q6600, 코어 2 익스트림 QX6800 등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텔 역시 등급을 높이면서 셀러론의 3000, 코어 2 듀오 시리즈의 5000, 6000, 7000, 8000과 익스트림 쿼드코어에게 9000번대 번호를 넘기면서 QX9770, QX9775 등의 고성능 프로세서로 이름의 한계를 맞게 되었다.
현재 주력인 E5000이나 E7000, E8000 시리즈 등에는 아직 여유가 있지만 성능과 기술력을 자랑하는 9000 시리즈는 이미 너무 높이 올라가 있어 10000번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의도적인지 때가 잘 맞았는지 인텔의 차세대 플래그십 프로세서인 코드명 네할렘의 ‘코어 i7’이 공식 데뷔를 앞두면서 자연스레 이름에 변화를 줄 기회가 되었다. 현재 시장에 먼저 등장한 제품은 2.66GHz로 작동하는 ‘코어 i7 920’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앞으로 코어 2 시리즈가 코어 i7으로 넘어가게 되면 서서히 300, 500, 600, 800 등의 다양한 시리즈가 이어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AMD – 숫자 이름짓기의 원조, 9950 다음은?
숫자로 이름을 매기는 것의 원조이자 이를 통해 아마 가장 큰 덕을 본 것이 AMD다. 그런 AMD 역시 피해갈 수 없는 10000번 앞에 섰다.
AMD가 숫자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를 먼저 살펴보자. 원래 인텔의 프로세서들을 생산하던 기지였지만 스스로의 이름을 달고 486 프로세서를 팔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장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인텔이 펜티엄 시리즈를 내놓자 AMD는 이에 맞서는 K5, K6-2, K6-III 등으로 따라 붙었다. K6-2 PR350 같은 프로세서들이 잘 알려져 있다.
7세대 프로세서인 애슬론으로 넘어가면서 AMD는 잠시 작동 속도를 이름으로 바꾼다. 1GHz를 앞두고 있던 1999년 클럭 경쟁이 치열할 때 자신이 있었던 AMD는 이 방법으로 인텔보다 간발의 차이로 1GHz 고지를 먼저 찍는 등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 애슬론 600MHz, 애슬론 XP 1.2GHz 등으로 이름을 붙인 제품들이 쏟아졌지만 2GHz를 앞두고 체력적으로 부침을 느꼈다.
인텔이 3GHz를 앞두고 있을 때 AMD는 다시 PR 점수를 이름으로 붙이기로 했다. 작동 속도가 곧 성능으로 인지되던 당시에 인텔보다 작동 속도가 떨어지던 탓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작동 속도는 낮아도 인텔의 이 제품과 견줄 만한, 오히려 더 높은 성능을 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애슬론 XP 써러브레드 1800+는 1.53GHz로 작동하지만 펜티엄 4 1.8GHz와 경쟁할 만하다는 뜻이다.
이는 꽤 성공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애슬론 시리즈의 승승장구를 돕는다. 하지만 인텔이 펜티엄 4를 접고 AMD도 페넘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경쟁사 제품과의 비교보다 상대적인 성능 높낮이를 표시하는 것으로 서서히 의미가 바뀌게 된다.
현재는 쿼드코어 페넘 9550, 9650을 비롯해 페넘 X3 8450, 8650 등이 시장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AMD역시 지난 8월 쿼드코어 페넘에 9950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네 자리 모델명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AMD는 아직 9950 이후의 이름 짓기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정할 수 없는 것이다. 수많은 추측과 소문이 무성하지만 현재로서는 9000대에 이어 10000, 20000번대의 다섯 자리 이름을 붙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적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다. AMD는 아직까지 확실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조만간 제품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AMD가 깜짝 놀랄 작명으로 10000번의 벽을 돌파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