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았다가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을 보게 됐다. 한두 편의 영화가
스크린을 독식하는 탓에 달리 볼 만한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1편을 보며 들었던 생각을 후속편을 보고 다시 정리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사실, 이 영화를 두고 평자들이나 관객들이 별로 말하지 않은 것들에 관심이 있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두고
로봇에 대한 유년기적 환상을 토로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무언가를 숨긴다. 이 영화의 표면에, 그리고 서사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전쟁의 모습 말이다.
<트랜스포머>의 1편을 보면서 이 영화가 환상성의 즐거움을 순수한 형태로
전시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성은 물론 현실에 불가능한 상상을
추가하고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상상이라 여긴 것을 현실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 상상은 현실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주로 어린 시절의 달콤했던 기억처럼, 유년 시절에 잠자리에 들 때 머리 맡에 두었던, 혹은 놀이의 대상이자 소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장난감들과 맺었던 친근한
감정들 같은 것이다. 언제든 만지작거리며 상상의 세계를 키워나갔던 장난감 로봇들 말이다.
머리맡이라는 친근한 거리가 표현하듯 이런 장난감들은 우리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주변에 머물러 있는 애완동물같은 것으로 가끔은 유모처럼 우리를 위험에서 보호해 줄 것만 같은 보호자처럼 보인다. 사물들과의 친근한 거리는 유년시절이라는 순수성의 상태에서 가능한 일이다. 스필버그는 <E.T>에서 그런 예를 보여주었다. 그가 <트랜스포머>의 제작에 참여한 것은 그러니 꽤나 어울리는 일이었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귀재라 불리는 마이클 베이는 그 친근한 꿈을 금속성의 기계와 결합한다. 가령, 유년성의 흔적을 영화의 한 장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디셉티콘의 로봇들이 신비한
에너지의 원천인 '
큐브'를 손에 넣으려는 시도를 좌절시키려 오토봇이 지구를
방문하는데 이들은 마치 천사들의 강림처럼 거대한 빛줄기를 타고 대지로 하강한다. 이를 본 꼬마아이가 탄성을 내지르며 한 말은 영화의 핵심적인 유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혹시, (당신들은) 장난감의 요정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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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랜스포머> 1편은 유년기의 환상에 육중한 금속의 몸을 위치시킨다. |
그런데 <트랜스포머>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이의 환상과 같은 상상의 세계에 디즈니세계의 달콤한 생명체들이 거주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좀더 날카롭고 경직된 움직임의 기계 로봇이 자리를 차지한다. 금속의 삐꺽거림이라는 지극히 기계적인 것에의 매혹과 신비함이 있다. 더 나아가 기계에 영성을 부여한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E.T>의 연성의 상상력에 <터미네이터>나 <로보캅>과 같은 기계-표피를 입었다고나 할까. 경직된
근육, 하드한 신체성을 지닌 로봇을 전면에 내세우며 기계의 분절적 움직임에 초자연성과 정신성을 기입하는 것이다. 가령, 영화 초반부에 샘은 그가 흠모하는 미카엘라를 차에 태우는데 그 때 그녀는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 내가 좀 근육질 남자에게 약한 것 같애.
가슴이 울퉁불퉁한 그리고
알통이 있는 남자에게 약하단 말이야"라고 말한다. 미카엘라가 근육에 매료되는 것은 이 영화의 본성과 일맥상통한다. <트랜스포머>의 매혹성이 바위처럼 단단한 신체성, 금속 기계의 '하드'한 바디에 있다는 점 말이다.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더 언급하고 싶다. 영화의 초반부,
카타르에 있는 미군기지가 미확인 괴물체에 의해 습격을 당하는 순간 기지에 있던 일군의 용맹한 병사들은 괴물에 대항해 격렬한 저항을 벌이는데, 전투가 끝난 후에 이들 중 한 명은 이상한 경험을 느꼈다며 동료들에게 토로한다. "난 그런 종류의 무기
시스템은 일찍이 본 적이 없어.
온도 감지
센서로 봤는데 그 녀석에게는 보이지 않는
포스들이 골격 주변을 덮고 있어 이상한 아우라가 느껴지더군." 카메라는 실제로 그가 괴물과 조우했던 순간에 온도감지기계를 관통하는 그와 괴물체의 시선의 교환을 다소 혼란스럽게 표현한다. 다른 친구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그건 불가능해. 그건 만화책에나 나오는 이야기야"라고 핀잔을
주자 그는 "'어머니가 그런 능력이 있었지. 나도 그 힘을 물려받은 거야. 마법과도 같은 주술적 힘이라 할 수 있지"라 덧붙인다.
기계와 인간의 신비로운 결속은 주인공인 샘이
중고자동차를 사러갔을 때도 발생한다.
중고차 판매인은 샘에게 "사람이 차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차가 사람을 고른단다. 인간과 기계의 신비로운 결속이 여기에 있지"라고 말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샘과 가디언 덤블비의 교감은 오토봇과 병사들의 교감으로 확장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오토봇의 로봇들은 희생이 따른 전투를 끝낸 후에 "우리는 용맹한
전사를 잃었다. 하지만 새로운
용사들을 얻었다"고 근엄하게 말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희생과
용기, 그리고 믿음의 결속으로 이어지는 서사는 극단적이다. 인간과 로봇의 교감은 유년기적 상상에 근거하는데, 이는 영화의 모토이기도 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과 연결된다. 이런 비가시적 유대는 유년기적 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희생이 뒤따르는 전투를 벌인 후에 보다 단단해지는 전우애라 할 수 있다. 가령, 덤블비가 비밀경찰에 끌려갈 때 오토봇의 기동전사들은 "그는 용맹한 전사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다치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도 이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라며 덤블비를 구출할 생각을 포기한다. 디셉티콘과의 최후의 결전에서 오토봇의 리더인 옵티머스 프라임은 샘이 죽음을 불사하고 '큐브'를 사수하려는 행동을 본 후에 크게 감동을 받아 자신을 희생할 결심을 한다. 이런 결속은 유년기적 교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생사를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나 있을 법한 전사적 유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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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랜스포머 2 : 패자의 역습>은 전편의 유년기적 환상의 세계를 본격적인 전쟁영화의 무대로 확장시킨다. |
2편에서 전우애에 근거한 유대는 <트랜스포머>를 전쟁영화라는 장르로 확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액션을 전쟁의 양상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이 그러하다. 특히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은 '스타트렉 시리즈'의
기원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며(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백 투더 퓨처'에 가깝다) 절멸로 시작한 유년기의 손상을 낙관적인 미래로 대치한다. 나는 이러한 귀환의 방식이 80년대
미국영화가 시도한 과거로의 귀환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과거로의 향수어린 귀환은 종종 시간을 거꾸로 돌아가게 한다. <백 투더 퓨처>(85)가 목가적 과거의 약속과 정신으로 미래를 대면할 힘과 용기를 회복한다는 이야기를 그린 것처럼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은 되찾은 순수성의 주제를 그려내기 위해 시간의 왜곡을 창조한다.
80년대 미국영화에서 과거의 귀환은 6-70년대의 정치적 암살, 폭력,
베트남 전쟁 등으로 손상된 미국인의 정체성의 혼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이후 빛이 바랜 군대라는 체제에 수정과 미화를 곁들인 일련의 영화들을 양산하기도 했다. <사관과 신사>(82), 그리고 해군의 전적인 협조로 촬영된 <탑건>(86)등의 작품이 이 때 나왔다. 군대에 대한 수정주의적 찬양이 있었던 것이다.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은 젊은이들의 군대영화라 할 수 있고, <트랜스포머: 패자들의 귀환>은 군대, 혹은 공각기대와 인간의 결속을 전우애로 미화한다. 미국영화는 언제나 거대한 재앙 이후에 역사적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환기시키는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미국영화는 집단적 상상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경험을 거친 이후의 국민들에게 손상된 정체성을 회복할 기회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지난해에 나왔던 영화들과 달리 최근의 미국영화들은 이런 회복의
기능을 수행하려는 시도들로 가득해 보인다.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의
상처는 일종의 국가적 실패를 불러왔다. 영화는 이러한 손상을 비관적이고 음울한 세계로 그려냈다. <다크 나이트>가 그런 예였다. 하지만, <트랜스포머>나 <스타트렉>은 국가적 패배처럼 보이는 상실을 전통적 미국적 가치관의
실종, 믿음의 상실로 치환하면서 재확신과 낙관주의를 불러오는 이야기를 창조한다. <스타트렉>은 재앙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앙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시간모험을 벌인다. <트랜스포머>는 하드한 전우애에 근거한 믿음을 강조한다. 이미지 없는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이미지를 파괴하고 또 이미지를 생산한다. 액션을 전쟁으로 확장하면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전쟁의 행복한
장례식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