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코메디언이자 작가인 지아니 판토니는 게으름을 찬양하는 모임을 열며 "게으름은 악이 아니라 지적인 능력"이라고 했다. 세상은 비록 그의 말에 후한 인심을 내어주지 않았지만, 게으름과 여유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느긋한 자들을 위한 변명만은 아닐 것이다. 6월의 찰랑이는 햇살을 이불삼아 게으른 오수(午睡)를 만끽하는 찰나의 시간은 그 어떠한 유혹보다 매력적이다. 그리고 여기, 당신의 낮잠을 더욱 달게 해줄 음악이 있다. 바로 스페인의 레이블, 시에스타의 레코딩들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낮잠'을 뜻하는 스페인어 '시에스타(Siesta)'는 음악과 만나 찰진 궁합을 들려준다. 마테오 귀스카프레(Mateo Guiscafré)와 마뉴엘 토레사노(Manuel Torresano)에 의해 92년 설립된 시에스타는 보사노바, 인디 팝, 이지리스닝 계열의 음악을 위주로 하는 소규모 인디 레이블이다. 낭만적인 나른함을 사랑하는 이들은 루즈한 듯 보이지만 정처 없는 루저들은 아니다. 예로부터 알짜배기 예술가들은 한량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주를 이뤘으며, 그들은 종종 자신들의 예술성을 바탕으로 담대하고 도도한 자신감을 표현해왔다. 시에스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무엘 베케트의 "게으름에 대한 열정보다 더 강렬한 열정은 없다"는 말을 인용하여 영혼과 미학, 공감대를 이루는 정체성을 목적으로 이 달콤한 레이블을 만들었으며, 한술 더 떠 이렇게 만들어진 시에스타는 후대들을 위한 임무라고 선언했다.
시에스타에는 모국인 스페인 외에도 미국과 영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스웨덴, 그리스 등 다 국적의 아티스트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뮤지션들의 다양한 배경과 각자가 추구하는 음악적 성향은 시에스타라는 이름으로 분명한 공통점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인생에 대한 낙관적 자세다. 시에스타가 추구하는 에티튜드는 그들의 대표적 뮤지션, 라 부에나 비다(La Buena Vida)의 팀 네임에서도 알 수 있다. '멋진 삶'이라는 뜻을 가진 라 부에나 비다의 음악은 스페인이라면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라틴계의 강렬함보다 지중해의 여유로운 정서에 더욱 맞물려있다. 여섯 명의 멤버로 구성된 이 혼성밴드는 내년이면 스무 돌을 맞는 만큼 폭넓은 음악적 변천사를 겪어왔다. 90년대의 이들은 말랑거리는 기타 팝에 오케스트레이션을 첨가하여 빈티지한 감성을 보듬어내더니, 요즘은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향한 지대한 관심을 진행 중이다.
라 부에나 비다의 조력자이자 시에스타의 프로듀서로도 잘 알려진 루이스 필립(Louis Philippe)도 시에스타의 간판 뮤지션이다. 60년대 중반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재키 드 새넌(Jackie de Shannon)에 바치는 트리뷰트 앨범 [Jackie Girl]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코넬리우스와 같은 시부야계의 뮤지션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가벼운 컨템포러리 팝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버몽(Beaumont)역시 시에스타라면 빼놓을 수 없는 팀이다. 벨 엔 세바스찬 풍의 새침한 멜로디를 자랑하는 버몽은 키스 거들러(Keith Girdler)와 폴 스튜어트(Paul Stewart)로 이루어졌으며, 트위팝 계열의 대표적인 밴드였던 블루보이(Blueboy)와 아라베스크(Arabesque)를 거쳐 현재의 버몽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시에스타를 가장 확실하게 설명해 줄 뮤지션으로는 리타 칼립소(Rita Calypso)가 제격이다. 본국에서는 그다지 큰 유명세를 누리지 못했지만, 이 여가수의 음색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미 친숙하다. 버트 바카라(Burt Bacharach)의 'Paper Mache'를 리메이크하여 이영애가 출연한 CF에 삽입했기 때문인데, 이 후 리타 칼립소의 음악들은 스페니쉬 뮤지션으로는 보기 드물게 라이센스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장식이 제거된, 그래서 오히려 감칠맛 도는 리타 칼립소의 목소리는 보사노바의 거장 라몬 레알(Ramon Leal)의 어레인지를 거쳐 시에스타 식 포크를 재구성한다.
시에스타는 자신들의 다양한 음악을 가볍게 접할 수 있도록 컴필레이션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게다가 그것은 샘플러 수준의 얄팍한 상술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표현하는 아트워크 쪽에 더욱 가깝다. 요즘 같은 시대에 미덕이라 칭송받아 마땅한 이들 컴필레이션의 대표작으로는 여행 3부작으로 잘 알려진 [Travel Trilogy]시리즈와 2002년 발매된 크리스마스 앨범[Fantasía de Navidad], 그리고 축구를 테마로 한 [Derby]가 있다.
특히 시에스타의 소재지인 마드리드의 빅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대한 애정을 담아낸 [Derby]앨범은, 취향에 따라 커버 이미지를 교체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와 같이 시에스타는 독특한 커버워크로 레이블의 자부심을 마음껏 드러내는데,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일러스트가 새겨진 디지팩은 이미 시에스타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흔하게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케이스와 성의 없이 찍어낸 부클릿으로 자신들의 음악에 담긴 정체성이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은 앨범커버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시에스타 특유의 발매넘버링이 어느새 200을 넘긴 지금까지, 한번도 비켜가지 않은 일종의 신념이다. 이처럼 낭창한 감수성과 긴 시간에도 빛바래지 않는 그들의 취향은 타이트하게 조율된 당신의 일상을 헤어놓고 매혹적인 휴식의 시간을 갖게 해준다. 우연히 들른 레코드 가게에서 '시에스타'라는 레이블 네임이 찍혀있는 시디를 발견했다면, 당신은 이미 즐거운 게으름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 boraby & Harper's Bazzar Korea 2006.
요즘 신규사이트 런칭때문에 정신이 없으삼. 출석미달 방지 겸 저의 휀들의 목마른 기다림에 한줄기 단비도 뿌릴겸 이번 달 바자에 들어간 시에스타 관련 기사를 올립니다. 요새는 얼른 프로젝트 잘 끝내고 팔자좋게 늘어져서 낮잠이나 푹 잤으면 싶다는 소망 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