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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엘뤼아르와 달리의 아내로… 유럽 예술사를 홀리다
19세때 결핵치료위해 스위스 머물다 엘뤼아르와 운명적 만남뒤 결혼
성적 분방함에 딸도 나몰라라 열살 연하 달리와 '미친 사랑'
일상적 혼외정사… 광적 매력으로… 일생을 초현실주의 속에서 살아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작가 이상과 화가 김환기는 한국 현대예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예술가들이다. 이상은 젊은 시절에 변동림이라는 여성과 짧은 결혼생활을 했고, 김환기는 중년 이후 김향안이라는 여성과 긴 결혼생활을 했다.

변동림과 김향안은 동일인이다. 이상의 아내로 기억되든 김환기의 아내로 기억되든, 변동림(김향안)은 단지 그 '염사(艶事)'만으로도 한국 예술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이다. 그녀 자신이 문필가이기도 했다.

유럽에도 변동림(김향안)과 비슷한 운명을 겪은 사람이 있다. 러시아 카잔에서 엘레나 드미트리에브나 디아코노바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갈라 엘뤼아르 달리(1894~1982)가 그 사람이다. 자신은 예술가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둘레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부여했다.

'갈라 엘뤼아르 달리'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독자라도, 눈치가 빠르다면, 그 이름 뒷부분에서 이 여자의 배우자들이 누구였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그녀의 첫 남편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1895~1952)였고, 두 번째 남편은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였다.
유럽 문단과 화단에서 엘뤼아르와 달리는 한국 문단과 화단에서 이상과 김환기에 맞먹는, 차라리 그들을 훌쩍 뛰어넘는 이름이다. 예술사는 엘뤼아르와 달리 때문에라도 갈라라는 이름을 누락할 수 없을 것이다.

미상불 그녀는 예술인으로서가 아니라 엘뤼아르와 달리의 아내로서 예술사에 기록되고 있다. 변동림(김향안)과 비슷한 경우다. 몇 권의 수필집을 남기기는 했으나, 변동림 역시 이상과 김환기라는 큰 이름과 연루되지 않았다면 예술사에 선명하게 기록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섯 사람으로 이뤄진 이 네 커플의 결합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도 있다. 이상의 아내 변동림은 남편이 죽은 뒤 김향안이라는 이름으로 김환기와 결혼했으나,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 그와 이혼하고 달리와 결혼해 갈라 엘뤼아르 달리가 되었다. 이상과 김환기는 아마 서로 모르는 사이였을 테지만, 엘뤼아르와 달리는 친분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고등학교 교사로서 삶을 마쳤을지도 모를 갈라가 조국의 혁명을 피해 서유럽으로 가서 명사(名士)가 된 것은 19세 때 걸린 결핵 덕분이었다. 그녀는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스위스로 건너가 클라바델의 한 요양소에 머물렀다.

요양소에 갇혀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더러 바깥 공기를 쐬었고, 그러다가 우연찮게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폴 엘뤼아르를 만났다. (엘뤼아르를 만난 것이 그 요양소에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지만, 갈라는 대학 공부를 마치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21세 때인 1915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유럽은 아주 커다란 전쟁(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러시아에는 혁명 분위기가 만연했다. 교사 생활 1년을 채 못 채우고, 갈라는 파리로 건너가 엘뤼아르를 만났다. 그리고 이듬해 결혼했다.

그들은 슬하에 세실이라는 딸을 두었는데, 모녀 관계는 갈라가 죽을 때까지 갈등으로 점철됐다. 갈라는 '어머니 타입'의 여자가 못 됐다. 그녀는 아이를 싫어했고, 자신의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갈라는 쾌락주의자, 특히 성적 쾌락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녀가 당대 유럽 기준에서 성적으로 특별히 분방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요조숙녀'가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

엘뤼아르의 아내였던 시절 그녀는 남편의 동료인 독일 출신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도 정기적으로 성 관계를 맺었고, 엘뤼아르는 그것을 묵인했다. 그들은 1920년대의 몇 년간, 마치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세 주인공처럼 살았다.

엘뤼아르를 따라 스페인에 갔다가 만난 젊은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재혼한 뒤에도, 그녀는 일상적으로 혼외정사를 했다. 물론 달리도 그것을 묵인했고 심지어 격려했다. 달리는 갈라를 만났을 때까지 동정이었는데, 본디 섹스에 대해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갈라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그가 바란 것은 정신적 사랑, 차라리 '휘어진' 사랑이었다. 달리의 아내로서 갈라가 사귄 '남자친구'들 가운덴 전 남편 엘뤼아르도 있었고, 또 비록 짧긴 했지만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도 있었다. 평균적 윤리감각을 지닌 사람들 눈엔 설었겠으나, 그것이 갈라와 그 친구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 성적 분방함이 초현실주의라는 예술사조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갈라는 젊은 시절 이래 일생을 초현실주의 속에서 살았다.

루이 아라공, 앙드레 브르통,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등 문학과 조형예술의 초현실주의자들을 그녀가 만나게 된 것은 죄다 엘뤼아르를 통해서였다. 비록 그녀 자신은 예술가가 아니었지만, 그런 사귐 덕분에 갈라는 자연스럽게 초현실주의 그룹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비조라 할 앙드레 브르통은 오래 지나지 않아 갈라를 혐오하고 경멸하게 되었다. 그것이 갈라의 성적 자유주의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브르통은 갈라를 두고 "친구로 삼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파괴적 영향을 주는 여자"라고 말했다.

갈라가 달리와 결혼한 뒤에는 그 부부를 싸잡아 "너무 돈을 밝히는 사람들"이라고도 비난했다. 거기에 달리는 거칠게 대꾸했다. "나는 갈라를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보다도, 피카소보다도, 심지어 돈보다도 더 사랑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갈라와 달리 사이의 사랑은 비대칭적이었다. 갈라가 달리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 대한 달리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었다. 스물다섯 살 때 바르셀로나 근교 카다케스 해변에서 반라(半裸)의 갈라를 보고 홀딱 반한 뒤, 달리의 마음은 이 열 살 연상의 여자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뮤즈였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찬사는 한이 없었다. 갈라가 아니면 자신은 미쳐서 요절했을 거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순전한 과장은 아니었다. 달리의 예술적 천재 뒤에는 늘 불안의 내면세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갈라는 달리의 초현실주의적 천재와 현실세계 사이의 접촉면이었다.

1930년대 초부터 달리는 자기 그림에 자기 서명만이 아니라 갈라의 이름까지 적어 넣었다. 이유를 묻는 갈라에게 달리는 이렇게 답했다. "내 그림들은 거의 다 당신의 피로 그려진 거니까요." 이쯤 되면, 갈라는 달리에게 '좋은, 아주 좋은' 아내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수많은 혼외정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갈라는 달리의 불안한 내면을 안정시켰고, 모델 노릇과 에이전트 노릇까지 했다. 갈라가 아니었다면 달리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부유하게 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 달리가 그린 많은 '성스러운' 여자들의 모습은 갈라를 그린 것이었다.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육감적 여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달리의 그림 속에서 갈라는 성(聖)과 성(性)을 함께 갖춘 여자였다. 또 '돈밖에 모르는 여자'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갈라가 냉정한 '장사꾼' 노릇을 하지 않았다면, 달리는 제 그림들을 비싸게 팔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이와 함께 갈라의 미모는 퇴색했고, 그녀는 젊은 애인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함으로써 연애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젊은 애인에게 달리의 그림을 준 적도 있다. 그리고 그것마저 달리는 용납했다. 그러고 보면 갈라는 달리의 뮤즈였을 뿐만 아니라, 착취자이자 독재자이기도 했던 셈이다.

엘뤼아르 생전에 이미 법적 결혼을 했지만, 시인이 1952년 작고한 뒤 갈라와 달리는 두 번의 결혼식을 더 치렀다. 1958년에는 가톨릭식으로, 1979년에는 콥트교(이집트 기독교의 일파) 식으로. 기묘한 부부다.

85세 '신부'와 75세 '신랑'의 결혼이라니. 더구나 유럽인들에겐 낯선 콥트교식 결혼이라니. 1982년 갈라가 작고했을 때, 달리는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 그가 그 뒤 일곱 해를 더 살 수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다.

함께 사는 부부가 처음의 연애감정을 같은 농도로 지속할 수 있는 기간은 두세 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갈라에 대한 달리의 사랑은 수십 년 동안 같은 농도를 유지한 듯하다.

그 사랑은 일종의 미친 사랑이었다. 그것은 섹스와는 분리된 사랑, 적어도 '정상적' 섹스와는 분리된 사랑이었다. 갈라는 달리를 광기에서 구해내면서 또 다른 종류의 광기로 사로잡은 셈이다.

"내 비밀 중의 비밀은 내가 그것을 털어놓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생전에 갈라가 한 말이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그녀가 착한 여자였는지 악한 여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매력적인 여자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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