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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항상 27살 청년의 모습인데, 동생인 내가 이렇게 '함뿍' 늙어서 미안해요. 게다가 지난 몇 년 동안 많이 아팠더니 오빠의 기억도 가물거리고, 아무래도 곧 오빠 곁으로 갈 것 같네요. 그때 만나요, 오빠."
지난 2월 14일 오전, 시드니우리교회에서 열린 '윤동주 민족시인 순국 65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86)가 국화 한 송이를 바치면서 오빠에게 전한 안부다. 윤동주 시인의 정확한 순국날짜는 오늘(2월 16일)이지만 그날이 마침 설날이기도 해서 이틀 앞당겨서 추도식을 치렀다.
중국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이민 3세'이다. 게다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쳤기 때문에 그가 모국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평양 숭실학교 1년, 서울 연희전문 4년을 합해서 고작 5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는 '서시'를 비롯한 대표작들을 모국에서 썼다. 비록 일제강점기였지만 말이다.
한편 윤동주의 생애를 증언해줄 수 있는 여동생 윤혜원은 20년 넘게 시드니에 살고 있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이 해외로 떠돌아다니는 것. 어디 그뿐인가. 그의 무덤이 지린성(吉林城) 룽징(龍井)에 남아있어 혼백마저 '영원한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
"오빠의 문학은 스물다섯 살에 끝났다"
윤동주는 3남1녀 중에서 장남이었다. 윤혜원은 7살 터울의 바로 밑 동생으로, 유난스레 명줄이 짧은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마지막 피붙이다. 윤혜원 아래로는 성균관대 교수 재임 중 50대에 타계한 윤일주(시인, 건축가)와 해방정국의 와중에 가족과 함께 오지 못하고 중국에 남았다가 30초반에 타계한 막내 윤광주(시인)가 있다.
이렇듯 3형제 모두 시인이었지만 동시로 등단한 윤일주 말고는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하거나 시집을 펴낸 일은 없다. 그래서일까. 윤혜원은 "동주오빠가 1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했기 때문에 윤동주 문학은 스물다섯 살에 끝난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윤동주 추모제가 전 세계에서 열리고 있으니 오빠는 시인으로서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윤동주의 문학적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은 그 나이에 본격적인 시세계를 구축하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됐고, '서시' 또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애송시로 꼽혔다. 25년의 짧은 생애에서 얻은 문학적 업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윤동주 문학을 접해본 몇몇 호주 시인들도 '윤동주 신드롬'에 빠지는 건 마찬가지다. 안나 비숍(크로아티아 출신 호주 시인)은 "1997년 시드니봄작가축제에서 윤동주 시편들을 접하고 나서 크게 감동받았다. 특히 '서시'와 '자화상'에 담긴 영혼은 너무 고와서 슬프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비숍은 영어로 번역된 '서시'를 원고 없이 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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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 연구의 메카가 된 시드니
언제부턴가 시드니가 윤동주 연구의 중심지가 된 느낌이다. 한국인들이 사는 수많은 해외 도시에서 윤동주 50주기와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는데 가장 큰 규모로 열린 곳도 시드니였다. 또한 윤동주 관련 뉴스들이 시드니로 바로 건너온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2005년 '윤동주 60주기 추도식'에는 오랫동안 윤동주 시고(詩稿) 원전연구를 해온 홍장학 선생을 초청해서 강연회를 가졌다. 또한 2008년 9월에는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와세다대학교 명예교수를 초청해서 '윤동주 문학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는 유실될 뻔했던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룽징에서 찾아낸 고마운 일본인이다.
그뿐이 아니다. 연세대학교 김찬국 교수가 참석했던 48주기 추도식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윤동주 추도식을 겸한 시낭송회 등이 호주한인문인협회와 시드니우리교회 주관으로 거행됐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재호주광복회가 전면에 나섰다.
윤동주 시인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 꼿꼿한 기개를 지닌 시인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살다가 순국한 애국지사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내로라하는 단체들이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것도 광복회가 전면에 나선 이유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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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주광복회 주관으로 열린 윤동주 추도식
이번 65주기 추도식을 기획한 재호주광복회 황명하 부회장은 "윤동주 시인은 독립유공자들에게 서훈하는 훈격(勳格) 7가지 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되는 '독립장'을 수훈한 순국선열"이라면서 "광복회가 나서는 건 당연하고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재호주광복회의 뜻을 대한민국광복회 본부에 전했더니 광복회장의 추도사를 보내왔다. 광복회에서 처음으로 보내온 추도사"라고 밝혔다. 한국에서 보내온 김영일 광복회장의 추도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윤동주 선생님의 시와 삶 속에는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찬 일제 식민지 현실을 부정하고, 이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젊은이의 고뇌에 찬 진정성이 묻어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시에는 유년의 평화를 갈구하고, 자아성찰의 깊이를 더해가며 일제강점기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올해는 특히 과거 어느 해보다도 올곧은 민족정기 발현이 필요한 해입니다. 시대를 통찰한 선생님의 명징한 시 정신을 본받아 경술국치 100년이 주는 준엄한 역사의 가르침을 하시라도 잊지 말고, 나라의 소중함과 주권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깨우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호주동포들은 윤동주 시인에게 독립장이 서훈됐을 뿐만 아니라 애국지사이자 순국선열로 모신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윤동주 시에는 일제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결여됐다"는 평가를 받는 게 의아스럽게 생각될 따름이었다.
중국 룽징-청진-원산-서울-부산-필리핀-호주로
윤동주 시인의 유족들은 왜 그 사실을 호주동포들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그것뿐이 아니다.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의 생애가 드라마틱하게 극화되거나 신비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걸 단호하게 거부한다. 특히 윤동주의 생애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는 언론인터뷰 등에는 손사래를 치기 일쑤다.
오죽하면 북간도에서 서울로 내려온 사람들이 부산-필리핀을 거쳐서 호주 시드니까지 와서 정착했을까? 시드니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윤동주의 유족이라는 걸 전혀 밝히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 홍길복 목사가 한국에서 건너온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고 "윤동주 여동생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다.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윤혜원은 1948년 12월, 중국에서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당사자다. 그 이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의 작품만 게재됐을 뿐이다. 현재 116편이 게재되어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에 의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공을 세웠지만 윤혜원은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결이 남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입을 꼭 다물고 살아왔다. 특히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윤혜원 부부가 서울-부산-필리핀-호주로 계속 남하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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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로서 말한다"면서 말을 아껴온 유족들
기자가 언젠가 대화 도중에 "윤동주의 민족의식이 어땠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더니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잘 몰라. 하지만 변절한 문학인들, 특히 이광수의 얘기를 하면서 아주 우울한 표정을 지었던 걸 잊을 수가 없어. 그리고 오오무라 교수가 전해준 재판기록 사본을 보니 1943년 7월 14일에 '조선독립운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았더군. 어린 동생들에게 민족 운운 할 수 없었을 터이니 그런 걸로 짐작할 수밖에 없지."
그런 다음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말을 어어 갔다. "오빠의 시를 읽으면 오빠가 그냥 보여. 신기할 정도로 오빠의 꼿꼿한 정신과 정갈한 삶이 시속에 담긴 거야. 어떤 평론가가 '윤동주는 시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일치한다'고 평했는데 그 말이 꼭 맞는다"고.
한편 2008년 9월에 '윤동주 문학 심포지엄' 참석차 호주를 방문한 오오무라 교수는 기자한테도 '윤동주 재판기록 사본'을 건네주었다. 재판기록과 함께 가져온 <홋카이도 신문>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윤동주는 조선 민족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전반에 걸쳐 준엄한 민족적 저항정신과 기독교적 인간애로 가득 찬 서정시 124편을 남겼다. 그의 시는 그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청렬(淸冽)하고 우아한 혼을 지닌 동시에 민족의 운명 역시도 짊어지고 있었다."
윤동주 시 세 편에 등장하는 순이(順伊)는 누구?
65주기 추도식은 예배형식으로 진행됐다. 홍길복 목사는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도 말하는 사람"이라면서 "살아서도 죽은 것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죽은 다음에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가받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설교했다.
김병일 시드니한인회 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윤동주 선생이 윤혜원 여사께는 혈육이시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별과 같은 시인"이라면서 "특히 시드니에서 윤동주 선생의 추도식이 열린다는 사실이 한인동포들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복"이라고 말했다.
한편 시낭송 순서를 맡은 호주한인문인협회 이동일 부회장은 "윤동주 시인한테는 여자친구가 없었던 걸로 알려졌는데, 그의 시 세 편에 '순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면서 "윤동주 연구자들이 한번쯤 연구해볼만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은 이어서 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윤동주의 시 <사랑의 전당>(1938), <소년>(1939), <눈 오는 지도>(1941)를 낭송했다. 한편 1941년에 쓴 시 <바람이 불어>에는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비록 시적화자(persona)의 고백이지만 그게 윤동주의 진짜 삶이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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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원 박춘애와 결혼할 뻔 했던 윤동주
윤동주의 생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윤혜원의 증언은 또 어떤가. "오빠는 여자친구조차 가져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만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박춘애라는 이름의 여학생 사진을 가져와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좋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 여성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빠가 어른들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 오형범도 비슷한 회고담을 털어놓았다. "해방 후에,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 사후에 박춘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옌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에 청진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는 박춘애를 만났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윤동주가 마음속으로만 좋아했을 뿐이고 프러포즈도 못했다고 하더라."
윤동주 시인 65주기를 갈무리하면서 오형범 장로가 나와서 유족대표 인사말을 했다. "시드니에서 윤동주 50주기와 60주기 추도식을 큰 규모로 치렀다. 그래서 보다 의미 깊은 70주기를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는데 윤혜원이 그때까지 살 것 같지 않아서 광복회의 65주기 추도식을 수용했다"고.
윤혜원은 심장병 수술을 두 번이나 한 상태이고 치매 치료까지 받고 있다. 남편 오형범도 건강이 나쁜 건 마찬가지. 뇌수술을 받았고 암 치료까지 받는 중이어서 정기적으로 병원에 간다. 그래서였을까. 추도식 참가자들 모두 두 분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