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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변하라고 한다
[뉴스메이커 2005-05-06 10:42]

헛기침만으로도 위엄을 세우고, 돈을 못 벌어와도 무시당하지 않고 살던 아버지는 이제 없다. 아이에겐 친구처럼 잘 놀아주는 아빠여야 하고, 아내에겐 양성평등한 남편이어야 하며, 직장에서는 잘리지 않고 잘 버텨야 괜찮은 아버지란 소리를 듣는다. 이제 가장이란 부담과 권위의 갑옷은 벗고 가볍고 따스한 사랑의 옷으로 갈아입어보자.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에는 눈물이 반이다. …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다’ -김현승의 시 ‘아버지의 마음’중에서

밤 11시. 김영수씨(50·자영업)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집에 들어선다. 아내는 드라마속 남자 주인공에게 푹 빠져 고개도 안 돌린 채 “왔수?”라고 건성으로 인사만 건넨다. 자기방에서 MP3로 음악을 들으며 인터넷 채팅을 하느라 아버지가 귀가했는지도 모르던 대학생 아들은 방문을 여니 고개만 까딱한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에 한쪽 귀고리. “사내자식이 그게 뭐냐”는 말이 어금니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는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고등학생 딸이 학원에서 돌아온다. 그가 돌아왔을 땐 본 척도 않던 아내는 “아유, 고생했다. 배 고프지? 뭐 먹을 거 줄까” 하며 아이에게 달려간다. 그제야 내일 막아야 할 어음 때문에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저녁도 못 먹은 게 기억난다. 딸 곁에서 한숟가락 뜨고 싶어도 “여태 밥도 안 먹고 뭐했냐”는 잔소리를 듣는 것이 귀찮아 쓰린 속으로 잠자리에 든다. 잠이 올 리 없다. 내일 막아야 할 돈도 다 못 구했는데….

“밖에서 피말리는 전쟁을 치르고 집에 돌아오면 위안을 받고 싶지요. 그런데 집에서는 마치 내가 ‘투명인간’ 같아요. 가족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어쩌다 눈에 띄어도 왕따지요. 마누라와 자식 먹여 살리느라 하루종일 땀흘리는데 그걸 알아주기커녕 인사조차 못 받으니… 불경기라 회사는 어렵고, 집에서도 웃을 일이 없고… 담배나 한대 피우려고 베란다에 서 있으면 가끔 떨어져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요.”

“아버지 술잔엔 눈물이 반이다”

가정의 달 5월. CF에선 가족들이 사랑 가득한 표정으로 “아빠, 힘내세요”라고 노래하고 어깨가 축 처진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안쓰럽다는 듯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며 남편의 손을 이끌지만 정작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면서도 제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아버지.

2005년 봄, 대한민국 뉴스에 등장한 아버지 관련 기사를 보자. 남편 3명 중 1명은 아내에게 폭력을 당한다(여성부 통계자료), 남성 3명 중 1명은 암에 걸린다(여성은 5명 중 1명이다), 40대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의 4배(우울증은 여성이 남성의 10배가 넘는단다), 고교생 아들의 성적부진을 비관한 아버지, 온가족 동반자살(아들만 살아났다)… 존경스럽기커녕 멀쩡한 아버지를 찾기도 힘들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봐도 ‘전원일기’의 김회장처럼 당당하고 위엄있는 아버지는 없다. 밥상에서도 마누리 눈치보느라 맛있는 반찬에는 젓가락도 못 대고(‘신입사원’), 생업전선에 나선 아내를 대신해 아이키우고 살림하는(‘불량주부’) 등 무능하거나 푼수로 그려진다. 한 남성심리학자는 “남성들은 후기 자본시대라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것도 앞으로 내뻗은 한쪽 발은 바나나 껍질을 밟고 있다”고 했다. 내디딘 발에 힘을 주는 순간, 직장이건 가정이건 어이없이 미끌어질 수밖에 없다.

40~50대 중년층인 아버지들. 헛기침만으로도 위엄을 세우고 돈을 못 벌어도 무시당하지 않고 바람을 피우고도 당당하게 아내에게 따뜻한 밥을 얻어먹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며 열심히 공부했고 취직한 후엔 앞만 보고 달리며 자랑스러운 가장이 되겠다고 사회의 온갖 수모를 참아온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영광의 트로피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의 싸늘한 시선뿐이다. 직장생활도 잘 버텨야 하고 가정에선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친구 같은 아빠여야 하고 장보기도 함께 하고 설거지 정도는 기본으로 하는 양성평등한 남편이어야 겨우 괜찮은 아빠란 소리를 듣는다. 물가보다 더 높게 오른 것이 아버지에 대한 기대치인 것 같다.

한 성형외과의사는 요즘 10년 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다. 예전의 그는 정말 바빴다. 방학이나 명절 등 남들이 쉴 때 수술이 많아 가족들과 여행은커녕 휴가 한번 제대로 못 즐기면서도 병원 규모와 자신의 명성이 커가는 것에 보람을 느꼈던 그는 얼마전 중대한 결심을 했다. 올초 동료의사가 뇌졸중으로 사망한 것에 충격을 받아 자신도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로 한 것. 그래서 가족과 함께 열흘 정도 유럽여행을 구상했다.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할 생각에 혼자 여행지를 짜고 호텔을 알아보고 티켓도 구입하고 소풍가기 전날 초등학생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모처럼 온가족이 모인 저녁 식탁에서 그는 자랑스럽게 비행기 티켓을 흔들었다. 박수갈채는 아니어도 기쁨에 겨운 표정을 기대했던 그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충격을 받았다.

40대 남성 자살률 여성의 4배


“집사람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2년 전에 애들이랑 다녀와 또 가기 싫다더군요. 둘째아들은 ‘그때는 중간고사기간인데 아빠는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니냐’고 오히려 짜증을 부리더군요. 큰아들은 가족여행은 재미없다며 친구들과 배낭여행 가게 그 티켓을 바꿔달라고 느물거리고… 가족들에게 난 그저 돈버는 기계였나봐요. 아이들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도 ‘갑자기 왜 이러나’하는 표정이에요. 이젠 가족들과 여유롭게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이렇게 타이밍이 안 맞으니… 홧김에 젊은여자랑 외국으로 도망가서 대접받고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회개하고 가정으로, 가족곁으로 돌아오려 해도 반기지도 않는다. 그래도 IMF 무렵에는 견딜 만했다. 온나라가 나서서 고개숙인 아버지, 불쌍한 아빠를 감싸고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젠 그런 온정은 기대하기 힘들다. 사오정, 오륙도 등 조로화한 사회라 직장에서도 버티기 힘들다. 평균수명은 자꾸 늘어 이제 유전자지도가 다 밝혀지고 줄기세포도 대중화하면 100살은 너끈히 산다는데 앞으로 50~60년을 계속 왕따로 살아야 할까.

아버지란 직책에 비상등이 켜진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가부장문화가 사라지고 호주제까지 폐지를 앞두고 아버지들의 심리적 불안감과 박탈감은 커진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에게 항상 성공을 강조하고 엄격함을 요구하던 아버지들은 흘러간 유행가, 철지난 우스개 같은 존재다. 어머니들은 항상 온몸과 마음으로 아이들 곁에 있으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지만 아버지들은 밖에서 딴세상과 싸우느라 아이들과도 아내와도 학습 진도가 너무 차이가 난다.

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소장은 “아이들은 친구 같은 아버지를 원하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슈퍼맨이고 싶은 것, 또 아버지들의 사추기와 아이들의 사춘기가 맞부딪쳐 갈등이 일어난다”면서 “이제 과거에 자신을 옭아맸던 가장이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자유로운 인격체로 평화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대치는 높아져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병후씨는 이 시대에 ‘아버지의 추락’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남성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강한 수컷, 멋진 권력자로 보이고 싶어해 자신의 약점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직장에선 상사에게 무능하다고 야단맞아도 집에 오면 큰소리치는 왕이고 싶어하죠. 그동안 밖에서 먹이를 가져오는 일만 하다가 이젠 들어와서 정서적 관계를 맺으려니 당혹스럽고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는 겁니다.

미국 등 서양에서도 큰소리만 치는 권위형 가장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버림받고 몇차례나 이혼당하는 등 ‘수난’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부드러워져 가정형 아버지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자신이 왜 소외당하는지, 왜 이혼을 요구받는지도 모르는 채 억울함을 호소하는 남성이 많은데 이런 과정을 거쳐 변화할 겁니다. 앞으로는 여성성이 가미된 아버지 등 친구 같거나 엄마 같은 아버지 등 다양한 아버지상이 등장하겠죠.” 그러나 배우도 아닌데 갑자기 장군 역을 하던 아버지가 상냥한 친구로 변신할 수 있을까. 권위로 굳게 걸어잠갔던 빗장을 풀고 여린 속내를 보여줄 수 있을까. 자신의 약점 노출을 치명상으로 아는 아버지들에게 가족의 따스한 위로가 치료제가 될까. 그러나 이제 스스로 변신을 하지 않으면 아버지들은 뼈빠지게 일만 하다가, 혹은 안방에서 혼자 가장놀이를 하다 더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가야 한다.


다양한 아버지상 등장하는 시대

남성학자 정채기씨는 “엄격하고 완벽함을 보여주는 것보다 ‘와, 아버지가 나보다 못하는 것도 있네’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 자녀관계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정한 스킨십이고 공감대라는 것. 김병후씨는 “먼저 아이들과 손잡고 산책을 하거나 그저 옆에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면서 “행복은 바로 곁에 있는데 아버지들은 너무 멀리 있다고 보고 우회해 가느라 가기도 전에 지친다”고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들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자신에게 상장을 줘야 한다. 40년 이상을 착한 아들, 훌륭한 아빠가 되기 위해 발버둥쳤으면 이제는 더이상 가족이나 남의 눈치보지 말고 좀 쉬어도 된다. 중년 돌연사 1위, 40대 남성자살률 1위의 대한민국에서 아직 죽지 않고 버텨온 것. 가족을 버리거나 버림받지 않고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마음껏 웃고, 실컷 울고, 때론 아주 유치한 모습을 보이면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이땅의 아버지들이 건강하게 버티는 방법이고 가족들에게 이해받고 사랑받는 비결 아닐까. ‘가장’이란 부담과 권위의 갑옷은 벗고 이제 가볍고 따스한 사랑의 옷으로 갈아입자.

<유인경편집장 alic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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