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란 무엇입니까? 쓸 만큼은 있어야겠으나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는 사람들과 나누며' 살면 좋을 뿐입니다. 그런 터라, 전우익 선생님은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그 재산을 자기 자신이나 자식들에게 쓰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농사지을 땅을 빼놓고는 이웃한 가난한 농사꾼들에게 거저 주다시피 나눠 주었습니다. 이런 삶은 전우익 선생님에게 평생 동무이자 둘도 없는 너나들이인 이오덕, 권정생 두 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세 가지만 있으면 돼"
전 우익 선생님은 집안이 좌익으로 몰리고 연좌제에 묶이고 보호감찰까지 받아야 하는 끔찍한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꼿꼿하게 자기 정신을 이어나갔고, 당신 스스로나 둘레에 있는 사람에게나 곧고 바른 마음을 나누었어요. 전우익 선생님이 보호감찰에서 풀려난 게 고작 십 몇 해쯤 앞서라지요?
그래서 집 둘레에서만 살아야 했고 늘 모진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삶은 전우익 선생님이 '글쓰기'를 멀리하고 '농사꾼'으로 조촐하게 살면서 뜻 맞는 동무들과 사귀면서 다른 테두리에서 옳음을 펼치는 쪽으로 가도록 했지 싶습니다.
1998년 어느 날,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찾아왔을 때 들려준 이야기가 <성균> 61호(1998년 가을호)에 실려 있습니다.
" 사람은 살면서 세 가지만 있으면 돼. 하나는 평생할 공부, 다음은 신나게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평생 함께 할 여자. 난 신영복 선생이 글 쓰고 강의하는 건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손수 빨래하고 일하는 게 대단해 보이는 거지. … 다들 입만 있지 귀가 없어. … 난 젊은 나이에 학생 운동하는 거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새는 세상만 바꾸려고 난리지 좀처럼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려 해. 자신을 먼저 깨고 바꿔야지. 바꾸려면 뿌리를 바꿔야지,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아니여."
이 말씀들을 가만가만 짚어 봅니다. 전우익 선생님과 신영복 선생님은 오랜 동무 사이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같은 책이 참 훌륭하다고 칭찬하면서도 '글쓰고 강연하는 일'보다는 '평범하게 빨래하고 밥하고 농사짓고 공장 일 하는 사람'들을 더 대단하게 느끼는 마음을 곱씹어 봐요. 또 사회를 바꾸고 올바르게 고쳐 나가는 데에 눈길을 둔다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가다듬고 고치는 데에는 애쓰지 않음을 비판하는 말씀은 두고두고 생각하고 되새겨 보고요. 이런 건 책으로 느끼거나 얻을 수 있는 슬기가 아니라, 몸소 땀흘려 일하고 부대끼는 가운데 느끼고 얻는 슬기일 테죠?
전우익 선생님보다 한해 앞서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이 쓴 시 가운데 <자리를 치는 전형>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동안 묵어 두고 있다가, 지난 가을에 <시경>이란 잡지에 실으며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작품입니다.
자리를 치는 전형
전형은 오늘 밤에도
자리를 친다.
자리를 치면서
글쓰는 사람을 욕한다.
"연암이 쓴 글에
글자가 나와서 사람이 모두
병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글을 쓰지 말아야 해.
쓰지도 말고 읽지도 말고
책은 다 불살라 없애야 해.
내가 권 선생한테
이 목사 제발 글 그만 쓰라 하라고
말했어.
빈 라덴이나 부시나
똑같다고 하는
이 목사는 노자 흉내를 내는 거야."
내가 전형보고
"그런 생각 제발 글로 써서
좀 알려 봐." 했더니
"난 자리치는 게 좋아.
글 쓰는 사람 한 사람도
바르게 사는 사람 없더라니."
전형 말도 옳고
이 목사 말도 옳고
두 분이 다
편하게 살아가는구나 싶다. (2001.11.25)
('권 선생'은 '권정생 선생님', '이 목사'는 '이현주 목사'를 가리킵니다. '자리'란 '돗자리'를 말합니다.)
언 제나 스스로 땀흘려 일하기를 즐기는 마음, 이렇게 땀흘려 일하면서 옳게 살면 자기 스스로도 옳을 수 있고, 둘레에 있는 사람들도 옳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 이 믿음처럼 소중한 믿음이 어디에 있을까요. 글로만 바르게 살자고 말하는 '글쟁이'가 아니라, 글은 안 쓰더라도 바르게 살면서 조용하게 자연과 벗삼고 어울리는 '농사꾼'이 바로 하느님이 아니겠느냐고 느끼는 이런 큰 믿음이 세상에 어디에 또 있을까요.
"나 말고 좋은 사람 많다"
전우익, 이오덕 두 분은 1925년 동갑내기입니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님은 늘 꼬박꼬박 "전형"이라 하고 높임말을 썼고, 전우익 선생님은 "오덕이"라 하며 평상말을 썼다는군요. 동갑내기인 두 분은 환갑 잔치도 함께 치르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 이오덕 선생님은 잔치하는 자리에 가지 못했습니다. 전두환 독재로 한창 서슬퍼렇던 그때, 이오덕 선생님은 과천에 살던 아파트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강제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전우익 선생님이 살던 곳도 경찰들이 다른 사람들이 더 들어오지 못하게 빙 둘러싸며 막았다지요.
집회를 할 때에도 이렇게 강제 감금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환갑 잔치를 하는 자리까지 가로막아 외롭고 슬프게 보내게 한 사람들은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런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였을까요? 그런 사람들과 사회를 바라보며 느낀 두 어르신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어제(20일) 경북 봉화 해성병원에 마련된 전우익 선생님 빈소에 다녀왔습니다. 전우익 선생님 주검은 화장해서 산과 들에 뿌린다고 합니다. 당신의 뼛가루가 이 땅 곳곳에 고이 고이 퍼지며 사뿐히 내려앉으면 우리는 그 뼛가루마다 담긴 뜻과 마음을 살포시 느끼면서 이어받고 새롭게 키우면서 거듭나게 해야 좋겠다 싶습니다. 중요한 건 추종이나 맹종이 아니라 이어받음이고, 어떤 방법으로 가신 님을 기리든 가장 깊고 너른 뜻을 받잡아 새롭고 알뜰하게 키우는 일일 테니까요.
"나 말고 좋은 사람 많다"는 당신 말처럼, 우리 둘레에 있는 좋은 사람을 느끼고, 우리가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알뜰한 일을 찾으며, 글을 쓰든 농사를 짓든 공장에서 일을 하든 술 한잔 비우며 놀든, 착하고 즐겁게 이웃하고 자연과 오순도순 지내면 그것으로 가신 님 넋을 받잡고 이어가는 끈이 되지 싶습니다.
" 김재규가 박정희 쏴 죽일 때 세상이 바뀔 줄 알고 전우익 선생님한테 어디 가서 살면 좋을까 하고 물었더니, 성냥개비만한 느티나무 묘목 하나 주면서 "어디를 가더라도 심어라" 하셨습니다. 그때 그걸 심었다면 그 25년 된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전우익 선생님 생각하며 쉴 수 있었을 텐데…….
이오덕 선생님의 아드님인 이정우님이 전우익 선생을 추모하며 남긴 말입니다.
우 리 삶을 밝히는 어른들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돌아가신 뒤에는 살아 있는 동안 남긴 자취와 여러 이야기로 힘이 될 테죠? 전우익 선생님은 다른 분들처럼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살아온 모습 그대로, 펼친 일 그대로 우리에게 고맙고 기름진 거름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가는 길에서는 아픈 몸 일으켜 활짝 웃으면서 즐겁게 가시면
좋겠어요. "사람이란 도대체 뭔지", "혼자 사는 재미가 아니라 함께 사는 재미"를,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이루길 바라는 그 뜻을 우리 모두 다소곳하게 느끼고 생각하면서 몸과 마음으로 옮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종규 기자
기자소개 : 최종규 기자는 대학교를 그만두고 우리 말-헌책방-책 문화운동을 합니다. 지금은 국어사전 엮는 일을 준비하며, 이오덕
선생님 원고를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1998년에 가장 어린 나이로 한글학회가 주는 한글공로상을 받았고 <모든 책은
헌책이다>란 책을 냈습니다. 개인 누리집 => http://hbooks.cyworld.com
우연히 웹서핑 중 '우익'이란 말이 눈에 들어와 종전부터 생각에 담고있던 '전우익'이란 분의 이름을 검색해보았습니다. 어느 새 별세하셨더군요. 2003년도 쯤에 그 분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 같이 그 책을 읽었던 분도 항상 생각나고 해서 그 책 내용보다는 그 때의 일들이 더 생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만 제가 군에 있을 때 벌써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깐 가슴 한편으로는 먹먹해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농담으로 하시던 말씀 중에서 이름이 우익인데 자꾸 남들은 좌익이라 한다고 하는 말 덕분에 좀 더 마음이 편안해지는군요. 바람대로 그분의 생각과 말이 이 세상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