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원로기자와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종이신문부터 인터넷까지 다양한 매체에서 창간을 주도하고 현장에서 활약했던 이다. 노기자는 대화 내내 최근의 언론 환경을 개탄했다. 정론이 사라지고 가십과 황색지가 판을 치는 현실에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했다.

“한번은 어느 신생 매체가 자기네 회사에 와서 조언을 좀 해달라기에 흔쾌히 찾아갔다. 그런데 편집국에 들어갔더니 이건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작은 사무실 안에 브라운관 십여대를 설치해 놓고, 젊은 남녀 직원들이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예능프로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아무튼 그걸 보면서 뭔가를 쓰는 모양이더라. ‘취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럴 일은 없단다. 순간 ‘아이고’ 싶었다. ‘우리 언론이 이렇게까지 망가졌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과거에는 찌라시는 그냥 찌라시일 뿐이었다. 거기에는 연예계에 대한 소문, 검증되지 않은 폭로, 낯뜨거운 선정적 이야기가 가득했다. 찌라시는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 가판대에서 남의 눈을 피해 사서 한번 보고 버리는, 눈요깃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찌라시는 찌라시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았다. 누구도 찌라시를 갖고 중앙일간지나 시사주간지와 대등한 언론이라고, 거기 실린 내용이 국제정세나 환율변동 뉴스와 동등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과 포털사이트가 미디어 평정에 성공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산다라박의 쌩얼 셀카 사진 업데이트 소식은 이집트 혁명과 같은 분량의 공간을 할당받는다. 여자연예인의 성형전 모습 공개가 정국의 키를 쥔 인사 인터뷰보다 크게 노출될 수도 있다. 더 야하고, 더 독하고, 더 충격적인 제목을 달면 달수록 클릭수는 높아진다. 뉴스의 변질이다. 찌라시가 정론과 대등한(것처럼 보이는) 지위를 획득하게 됐다.

그리고 같은 찌라시 사이에서도 치열한 선정성 경쟁이 시작됐다. 드라마속 캐릭터의 이혼을 실제 배우가 이혼한 것처럼 보도한다. 유명인 트위터를 종일 지켜보다 글 한줄을 기사 하나로 잔뜩 부풀린다. 일부 온라인 게시판에서 벌어진 사소한 논쟁을 ‘파문’, ‘사회적 논란’으로 격상시킨다. ‘알 권리’를 주장하며 사람들의 ‘모를 권리’를 깡그리 무시한다. 그러다 또 사람을 잡았다. 이번에도, 어김없다.



MBC 스포츠 플러스 송지선 아나운서가 고인이 됐다. 시작은 그의 미니홈피와 트위터였다. 하지만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다. 해프닝일 수도 있었다. 충분히 쉬쉬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백번 양보해도 어디까지나 사생활 영역이었다. 그게 온 인터넷을 뒤덮고, 샅샅이 수색하고, 다른 중요한 뉴스를 모두 뒷전으로 밀어내야 할 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한 야구기자의 말이 정답이다. “보도할 가치가 없는 일 아닌가?” 보도가치가 있는 뉴스를 선별해서 보도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다. 보도가치가 있어도 팩트가 없으면, 그 기사는 데스크에서 ‘킬’ 한다. 적어도 정상적인 언론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찌라시는 찌라시였다. 이미 지워진 미니홈피 글을 끄집어내 도마에 올렸다. 팩트 없이 추리를 시작했다. 공개되어서는 안 될 부분을 드러내고, 사람들이 몰라도 될 일을 만천하게 떠벌였다. 네티즌의 반응을 실시간 중계했다. 당사자가 트위터에 글을 올리면, 문장을 하나하나 조각조각 해체한 뒤 자신들만의 해석을 덧붙여 수백개의 기사로 만들어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당사자들을 비난하고 악플을 달라고 선동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국민적 ‘신상털이’의 주범은, 바로 찌라시였다.

결국 비극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신나게 개인의 불행을 팔아 조회수를 높이던 찌라시들이, 순식간에 낯빛을 바꿨다. 근엄한 표정으로 네티즌을 훈계한다. ‘이 모든 것이 악플과 SNS 때문이다’라고 비판한다. 살인마가 사랑과 자비를 노래하는 격이다. 자신들이 행한 패악질에 대해서는, 일말의 반성도 없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찌라시 고유의 본능은 여전하다. 고인의 사망 이유에 대한 이런저런 추측이 시작됐다. 유족과 관계자를 붙들고 정신고문을 시도한다. 네티즌 반응 생중계는 기본이다. 그렇게 조회수는 올라간다.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보다 많은 카메라가 따라붙었다. 식장에 들어서는 유명인들의 패션과 표정을 사진에 담아 ‘화보’로 팔아먹는다. ‘슬픔을 가지고 장사하지 않겠습니다’라던 어느 상조업체만도 못한 짓거리가 언론의 이름으로 벌어진다.

슬픈 선택을 하는 사람 누구나 그렇듯이, 고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는 꺼내 보일 수 없는 그 나름의 내면적 지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더욱더 코너로 몰아간 것은, 바로 언론으로 행세하는 찌라시였다. ‘여신’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여성 스포츠 캐스터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하다. 대부분 1년 단위 계약직이다. 구설수에 오르면 물러나야 할 수도 있다. 새로운 ‘여신’이 등장하면 자리를 내줘야 한다. 때문에 좋지 않은 뉴스로 화제가 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치명타다. 한번 황색언론에게 물어뜯기고 나면 커리어가 끝날 수도 있다.

게다가 그 구설수가 야구와 관련된 문제라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남성 호르몬이 들끓는 야구계는 여성이 일하기에 그다지 환경이 좋은 곳이 못 된다. 좋은 내용이건 나쁜 내용이건 소문도 많다. 언젠가 그는 “지난 3년간 일하면서 수많은 루머를 겪었다”고 했다. 연약한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견디기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여성 아나운서를 전문성을 가진 ‘직업인’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신’을 다룬 인터뷰와 치어리더나 배트걸을 다룬 인터뷰를 보면, 질문들이 대동소이하다. 외모와 특정 선수와의 친분과 남자친구 유무가 관심사의 전부다. 특정 선수와 아나운서를 연결짓는 언론과 팬들의 짓궂은 장난은 언제나 아슬아슬하다.

실은 방송사와 신문의 ‘여신 마케팅’ 자체에 이미 성상품화와 성희롱적 요소가 다분했다. 그 결과, 그들을 전문성을 가진 방송인으로 대우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질문이 나온다. 그들을 그렇게 여겼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 나온다. 비극은 이미 여신 마케팅 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대사처럼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비극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비극이었다.

한국의 미디어 환경이 조금만 덜 오염됐더라면, 사람들이 그들을 ‘여신’이 아닌 ‘방송인’으로 여기고 대우했다면, 관련된 이들이 조금만 더 사려 깊게 행동했다면 말이다. 물론 유명인 사생활의 영역을 존중하지 않는 대중과 그들의 오염되고 비뚤어진 성 관념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다. 산 사람을 여신으로 삼아 산채로 제물로 바친 고대 잉카의 야만과 한국 사회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여신은 없다. 지난 몇 주간 지옥을 경험하는 동안에도, 그는 한번도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없었다. 서운한 사람도 미운 이도 많았을텐데 아무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영혼이었다. 그가 자신을 괴롭힌 모든 문제와 괴물들에게서 벗어나, 부디 평안하기를 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같은 불행이 되풀이되는 일이 없기를, 누구도 부당하게 물어뜯기거나 희생양이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우리가 비극에서 배워야 할 게 있다면, 그것뿐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진심으로.

그리고,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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