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학문적으로 순우리말을 엄밀하게 정의하긴 어려운데, 이른 시기 문헌자료의 부재로 아직 한국어의 계통과 성립과정을 뚜렷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유사 이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확실한 한자어와 그 밖의 외래어를 뺀 나머지 말을 순우리말로 보면 대략 무방하다. 비교언어학에서는 차용어를 비교대상으로 삼는 것은 삽질이 되므로 고유어는 매우 귀중한 재료이다. 순우리말은 한국 주변의 다른 민족의 말과 연관 관계가 보이지 않아 한국어를 고립어로 보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버스나 컴퓨터같은 낱말을 놓고 영어 bus, computer랑 같기 때문에 영어랑 우리말은 같은 계통이다고 하면 안된다는 말. 지금 우리는 한국어 버스와 컴퓨터가 영어에서 빌려온 말이라는걸 잘 알고 있기에 판별이 쉬워보이지만 수백, 수천년 전에 들어온 말은 그런 의식이 옅어지거나 사라진다.
웃긴 것은 '
순(純)
우리말'이라는 말 자체가 순우리말이 아니다. 토박이 말도 土박이 말이기 때문에 별다를 게 없다. 때문에 민우리말이라는 말이 생겨나긴 했는데, 민머리,
민둥산같은 '민'의 용례를 보면 알겟지만 민우리말은 원래 뜻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맨우리말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또 누가 여기에 토를 달겠지 그냥 참우리말로 갑시다.사실 순우리말이라는 것이 적을 수 밖에 없는게,
한자와
한문이 오랫동안 지배층의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권위로 받들어지면서
주시경 이전까지 우리말에 학문적으로 주목하거나 애착을 가진 사람이 매우 적었고, 우리말를 표기할 알맞은 글자(
한글)가 너무 늦게 등장한 탓에 고대 우리말은 말소리를 적는데 대단히 불편한데다 표의문자라 어원을 왜곡하기 일쑤인 한자로만 불완전하게 일부만 적히면서 한자어로 둔갑하거나 제대로 이어내려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고려시대 중국사신이 적은 계림유사란 책에서 동서남북의 고유어가 소멸된 것이 관찰된다.
그 결과가 국어 사전에 실린 단어의 대다수가
한자어이다. 거기다가
동음이의어의 대부분도 한자가 다른 것이라, 한자가 없다면 언어 표현의 범위가 확 줄어버린다. 이런 점 때문에 순우리말을 애용하려고 생각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한자를 어느정도는 배우는 것이 좋다.
과거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의
PC통신 시기에는 컴퓨터 용어를 순우리말로 대체하고자 했던 시도도 매우 많았다. 예를 들자면 소프트웨어는 '무른모', 하드웨어는 '굳은모', 캡처는 '갈무리', 버전은 '마당' 등등. 지금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지만 혹시 그 시절에 나왔던
이야기같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면 볼 수 있다.
물리학계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있어 전기장을 '전기 마당' 등등으로 순화한 단어가 잠깐 쓰이긴 했으나……. 다만
사람 이름을 순우리말로 지으려고 했던 시도는 나름대로 성공했고, 극소수이지만
누리꾼과 같은 순우리말 단어 일부가 (
억지 밈이긴 하지만 하도 쓰이다 보니) 살아남은 예는 있으며, 학문적으로도 서양 언어를 한자어나 순우리말로, 그리고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고치려는 시도는 계속 이루어져 보급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영어판으로는
앙글리시 운동이라는 게 있는데 이쪽은 소수파. 이 동네는 사실 언어가 한 국가의 고유 언어라기보다는 유럽 전반의 어족으로 구분되는 성향이 강해서(대개
라틴어 +
게르만어) 구분하기 더 어렵다.
전체적으로 외래어, 외국어보다 속된 어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몇몇 순우리말 단어들은 오히려 한자어보다 더욱더 문어적/고급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나이'(장정)와 '주검'(시체) 혹은 '범'(호랑이) 등의 단어가 대표적.
블리자드의 한글화 작업이 한문을 많이 쓴다고
한문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특히
스타크래프트2 에서 이런 의견이 많이 나왔다.), 예를 들어 '
파이어볼' 은 화염구로 번역 되었는데, 이는 '불공'이 동음 이의어로 '부처 앞에 공양을 드림'등의 여러 뜻이 있는지라 뜻을 정확히 하기 위해 '화염구(火炎球)'로 쓴... 게 아니라 아무리 봐도 이건
안 멋지니까다. 실제로 판타지 소설 읽고 쓰는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떡밥으로 올리면 늘 걸리던 시비가 "그럼 파이어볼은 불공이냐?" 같은 식이었다. 같은 마법사 주문 중에 순우리말인 '얼음 화살(Frostbolt), 얼음 회오리(Frost Nova)' 등이 있는 걸 보면 결국 어감으로 멋이 나는가의 문제.
'불덩이'로 하면 괜찮지 않나? 위에서도 나왔지만 우리말 특징이 일단 한문으로 된 단어들이 없으면 의사소통 자체가 힘든 수준이다. 한문을 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심지어 외래어를 죄다 순우리말로 고치기로 유명한 북쪽동네도 상당수의 한자어를 그대로 두고있다그리고 덤으로 러시아어 추가.
물론 WOW 이전에도
이영도(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등 몇몇 판타지 소설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순우리말을 집어넣었다. 이는 순우리말 단어가 가지는 신비성 때문인데 한자가 들어간 단어나 외래어 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순우리말, 특히 미르와 같은 사어(死語)들은 평상시 접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면 판타지 소설의 생명인 '뭔가 있어보이는'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이런 지경까지 주저앉은 순우리말의 위상에 슬퍼해야 할지 아니면 이렇게라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기뻐해야할지... (뭐, 영국 판타지 소설에서 게일어 쓰는 정도의 위상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실 흔히들 '옛 우리말'이라고 알려져 있는 단어가 정확히 어느 시대에서 어느 국가가 쓰던 말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잘 없지 않은가?) 다만 판타지 소설에 쓰이는 순우리말 중에는 작가가 임의로 지어낸 말들도 섞여 있는데 이른바
가짜 순 우리말이라 하여 마치 순우리말처럼 퍼지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WOW처럼 잘 쓰면 간지 폭발이지만, 조금이라도 잘못 쓰면 간지는 커녕 주변을 얼어 붙게 만든다. 극단적인 예가 다름아닌
왈도체. 실제 왈도체 문장들은
사람이 일일히 오역번역하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문장 구조를 하고 있다. 가장 어려운 단어는 역시
모국어라는걸 실감할 수 있다. 자주 보이는
발번역된 경우를 보면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하느니만 못하다. 실제로 번역보다는 원문이 더 낫다는 사람들이 주로 번역의 문제점으로 꼽는 부분 역시 이 부분이다. 뭐, 정말 잘 하면 아무래도 좋긴 한데... 이외에 제시되는 문제로는 원어와 번역어의 느낌 차이인데, 예를 들어
드래곤을 주로 대체하는 단어인
용이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다든가 하는 것이 있다.
또한 일부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순우리말이라고 생각하는 말들 가운데 유사 이전 또는 고대에 중국어에서 들어왔다고 생각되는 단어가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가 바람으로, 바람의 옛 발음 pʌrʌm(* ㅂ은 무성음이라 p로 표기. '발람'이 아니라 '바람'이라 l이 아닌 r로 표기. 아래아는 ʌ로 표기.)은 풍(風)의 옛 발음인 pljəm(p와 l 사이에 a만 들어가도 바렴 비슷하게 되어서 바람에 가까운 발음이 된다)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설이 꽤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국학자에 따르면 태국어에도 바람의 뜻으로 자음의 배열이 비슷한 단어가 (p r m)있기 때문에 중국어 자체도 남방으로부터의 차용이거나 또는 개별 국가나 민족이 형성되기 이전 시기의 특정 종족집단이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일수도 있다.
또한 강의 우리말인 가람의 옛 발음 kʌrʌm이 한자 강(江)의 상고재구음 gar과 유관하다든가, 마을의 옛 발음 mʌʌr이 리(里)의 상고재구음 mljəg의 차용이라든가 하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이 있으나 정설은 아니다.
가람에 대해서는 중세에 kʌrʌm외에 kʌrʌl이란 어형이 확인되며, 동족어휘로 생각되는 개울이란 단어도 있다. 주로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 김용욕의 부인인 중국어학자 최영애나 한양대교수 엄익상등 중국어학자들 가운데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한자의 상고재구음 자체가 일종의 가설로서 유추해낸 것으로 학자들마다 설정하는 재구음이 다르고 앞으로도 바뀔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 아니며(곧 아직까지는 누구누구 학자의 가설임) 차용관계가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 유사이전 시대의 언어흐름에 대해서는 추정이상의 것을 말할 수 없다. 이들의 주장대로 옛 중국어의 차용일수도 있으나, 반대로 한국어의 조어(祖語)가 속할지 모르는 알타이어가 중국어에 미친 영향일 수도 있으며(우리나라와 중국이 주로 접촉했던 만주나 요동지역은 알타이어계통의 언어를 쓰던 종족이 다스리던 땅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줄곧 이민족을 흡수하면서 영역을 확장해나간 나라이기 때문에 본디 중국어에 속하지 않았던 언어의 흔적이 중국어에 흡수되었다가 다시 한국어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
원래는 한자어였는데 발음의 변화로 인해 한자어의 규범의식이 사라져 순우리말이 되어버린(?) 단어도 여럿 있다.
붓은 필(筆)의 순우리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筆의 예전 한자음이 변화한 것이다.
먹도 묵(墨)의 발음이 변한 것.
근데
태평양 한가운데 외딴섬이 아닌 이상, 타
문화와의 교류는 당연한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소리가 아닌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없던 새로운 개념을 흡수하는 것은 우리말의 확장이지 오염이 아니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따지면 자존심 안 상하는 언어는 거의 없다.
영어만 해도 수많은 언어가 뒤섞여 개판이다. 동사가 불규칙적으로 변한다거나, 강세가 일정하게 붙지 않는다던가, 스펠링과 발음이 완전 달라서 스펠링 따로 발음 따로 외워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는 등 영어를 배워봤다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다
프랑스어, 노르만어,
라틴어, 초기
게르만어 등과 수백 년에 걸쳐 뒤섞여서 그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