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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연애 / 소개팅 잔혹사

오빠, 정규직이어야 해 

진짜 진짜여야 한다고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를 ‘집이 없다고 해서’, ‘정규직이 아니라고 해서’, ‘차가 없다고 해서’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듯합니다.

연애를 하게 되는 루트는 다양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드라마에선 우연한 기회에 만난 남녀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연인이 되곤 하지만 실제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특히 서른이 넘으면 주변에서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이미 괜찮은 사람들은 모두 임자가 있다.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엄청난 신경전과 눈치작전을 해야 한다. 성공보장률도 높지 않다.

나도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는 연애가도에 큰 문제가 없었다. 대학에 다닐 땐 주변에 좋은 후배들이 많았고, 30대 넘어서도 달달한 연애를 이어갔다. 야구로 치면 장효조·장성호·양준혁이 부럽지 않았던 연애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32살이 넘어가면서부터다.

만남 그 자체 혹은 연애가 목적이 아니라 결혼을 염두에 두는 만남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나의 고타율은 저공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석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공부를 좀 길게 한 탓에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기 시작했고 나만 남았다. 붙임성이 좋은 덕에 친구 와이프들과도 잘 지냈다. 그녀들은 내가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들의 싱글 친구들을 소개해주고 싶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망설였다.

나는 직업이 없다. 하는 일이 없이 노는 게 아니라, 명함이 없다는 게 정확할 거다. 친구의 와이프들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대놓고 ‘직업이 마땅하지 않아서 소개해주기가 사실 좀 그래요’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먼저 소개팅을 해달라고 한 적은 별로 없다. 오랜만에 밥을 먹다가도 ‘누구누구 좋은 사람이 있는데 참 아까운데 언제 취직해요?’ 이런 질문이 날아온다. 대식가인 나는 얻어먹는 밥인데도 식욕이 떨어진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안다. 골초라고 해도 밥을 먹는 중간에 담배를 피우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그랬다.

간호사인 아는 여동생한테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하는 후배가 참한데 소개해줄 사람이 있느냐는 거였다.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지 사진도 함께 보냈다. 내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내 후배에게 보여줬는데 그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란다. 정중히 거절하면서도 살짝 떠봤다. 혹시 나를 소개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생각보다 무서웠다. ‘오빠 정규직이어야 해. 진짜여야 한다고.’ 아니 그럼 나는 가짜인가? 그 이후부터는 주변 사람들에게 ‘누굴 소개해달라’고 혹은 ‘저 아가씨 남자친구 있어요?’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더 이상 상처받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조건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건 20대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누나가 교사인 자기 후배랑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머뭇거렸다. 어찌해야 할지. 우연히 내 블로그를 보게 된 누나의 후배가 나를 소개해줄 수 있냐고 먼저 물었단다. 그래서 소개팅에 나갔다. 추석 전날이었다. 내 오산이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사는 곳을 묻는다. 성수동이요. 그 여자가 물은 것은 주소가 아니라 집의 종류였다. 난 집이 지방이라 서울에서 월세에 산다. 더군다나 반지하였다. 여자는 당황스러워했다. 나는 당시에 꽤 큰 회사에 다녔는데, 이번엔 정규직인지 계약직인지 물어봤고 계약직이라고 하자 정규직 전환 가능성을 묻는다.

소개팅해줄 사람 찾는

아는 동생 연락받고 

난 안 되겠느냐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무서웠다 

32살이 넘어가면서부터 

연애하기 어려워졌다 

비정규직에 집도 차도 없는 나 

조건 아닌 어떤 사람인지 묻는 건 

20대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가능성이 0%였다. 특정 프로젝트 때문에 임시로 일하기로 한 거였기 때문이었다. 살던 집이랑은 거리가 좀 있었는데 멀어서 힘들지 않냐고 묻는다.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버스전용차선 덕에 안 밀린다고 했다. 그녀는 이미 그때 끈을 놓아버렸다. 그 이후에 그 선생님은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술을 잘 마셨는데도 어느 정도 먹더니 전화를 하러 자리를 비웠다. 친구들이 근처에 있다면서 획 가버렸다. 그녀의 차는 에스엠파이브(SM5)였다. 내가 오피스텔에 살고 ‘케이 시리즈’를 탔으면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 

잔혹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같이 지내는 후배가 자기만 연애를 하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한번 만나시죠 형님’ 하면서 연락처를 건넨다. 천안에 거주하는 여자였는데 서울에 와 대학로에서 만나는 것까지는 주선자들끼리 합의가 됐다. 세부적인 건 당사자들끼리 조율하기로 했다. 그 주에는 유난히 일이 많아 만나기로 한 당일 전날에야 연락을 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내가 카카오톡에 안 뜬다며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했다. 아이디를 알려주고서야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 얼굴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문자가 왔는데 충격적이었다. ‘죄송한데요. 정말 죄송한데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얼굴이 문제가 되긴 처음이었다. 늙어가긴 늙어가는구나.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 얼굴이 너무 노안이라서 만나기가 좀 그랬다는 거다.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는 것, 쉽게 만날 수 있으면 쉽게 만날 수도 반대로 수많은 경우의 수와 조건을 따지고 만나는 경우도 있다. 여러 가지 조건을 가지고 미리 재단한다고 해서 연인이 될 가능성을 높여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안다. 어쩜 자신들이 처할 비난에 대해서 미리 방어막을 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남에게 피해를 주어선 안 되겠다. 한편으로 내 얼굴을 보고 급문자를 보낸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도 그런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다. 

결혼 아닌 연애가 하고 싶은 30대 중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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